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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의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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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병사

건청궁(옥호루)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진 장소

청일전쟁을 통하여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한 일제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중전 민씨를 살해하였다. 그들은 여론의 반발을 호도하려고 친일내각에 ‘내정개혁’을 강요하였다. 그 주요한 내용은 관제를 개혁하고, 군현제도를 개편하며, 양력을 사용하도록 하는 등의 조치였다.

오랜 전통 속에서 정비된 제도에 대한 급격한 개혁은 결국 기존의 역사와 단절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특히 을미년 음력 11월에 강요된 단발령은 분노를 터뜨리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문화적 자존심을 짓밟는 폭력적 조치였기 때문이다. 머리 카락 하나까지 부모가 주신 것이라면서 존중하던 이들에게 단발을 강행하니 거리에는 사람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당시 제천의 장담에는 화서학파의 계보를 이은 유중교가 이주한 1889년 이래 많은 선비가 모여들어 강학에 열중하고 있었다. 유중교의 사후에도 그의 제자들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척사의 정신을 천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발이 강행되자 현실에 대처할 방법을 논의했고, 그 자리에서 당시를 ‘중화가 오랑캐가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극한상황’이라고 진단하였다. 그리고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는 것과, 국외에 망명하여 도맥(道脈)을 계승하는 것, 그리고 조용히 자결하는 것 등의 방안이 제시되었다.

유인석은 망명하고자 했으나, 일부의 소장파 문인사우(門人士友)는 의병봉기의 길을 선택하였다. 안승우는 지평(지금의 양평)의 고향으로 돌아가 이춘영과 포수 출신의 김백선 등과 힘을 모아 원주의 안창에서 의병의 깃발을 올렸다. 11월 28일(양력 1896. 1. 12)의 일이었다. 그들은 제천으로 즉시 진격하였고, 이필희가 대장으로 추대되면서 장담의 선비들이 의진에 모여들었다. 단발을 강요하던 군수 김익진은 도망가 버렸다. 의병들은 밀려오는 적을 단양의 장회협에서 맞아 싸워 귀중한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지휘부는 포군(砲軍)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전투에서 승리하였음에도 포군들은 영남 지역으로 흩어져 버렸고, 지휘권은 다시 이춘영에게 넘어갔다. 이춘영은 영남으로 내려갔던 포군들을 다시 수습했고, 제천과 강원도의 영서 지역을 돌면서 포군을 모아온 안승우의 부대와 영월에서 다시 합쳤다. 그들은 효과적인 의병 항쟁을 위하여는 권위 있는 지휘부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인석에게 대장을 맡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유인석은 모친상과 능력부족을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결국 영월에서 호좌의진, 즉 제천의병의 대장의 자리에 올라 의병봉기의 명분을 팔도에 고하였으니 을미년 12월 20일(1896. 2. 7)이었다.

제천으로 진주한 의진은 일거에 인근 여러 제천·청풍·단양·영춘의 사군(四郡)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친일적 태도를 보이며 협조를 거부하던 단양 군수 권숙과 청풍 군수 서상기를 먼저 처단하였다. 그리고 전열을 정비하여 충주성 공략에 나섰다. 충주성은 바뀐 지방제도에 따라 20개 군을 거느리는 관찰부의 소재지였고, 당시 관찰사 김규식은 친일 정권의 명령대로 단발령을 강력히 시행하여 원성이 높았다.

의병사진

제천에서 출발한 의진은 두 부대로 나누어, 충주성을 향해 달렸다. 주력부대는 주포를 지나 박달재를 넘었으며, 별동대는 은밀히 청풍 쪽을 우회하여 마수막재를 넘어 충주성으로 들이닥쳤다. 이에 충주성은 일거에 의병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1896년 1월 5일(2. 17) 저녁이었다.

애초에 제천의병은 충주성을 장악한 후, 인근의 호응을 받아 서울 쪽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충주 지역의 호응이 기대에 못 미쳤고, 충주성을 되찾으려는 일본군과 관군의 집요한 공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중군장 이춘영은 조령 일대를 장악하여 영남 지역의 역량까지 동원하려는 국면타개책을 내놓았고, 이를 위하여 수안보를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그리고 의진내에 비중 있는 인물이었던 주용규도 충주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결국, 제천의병은 고립된 상태에서 더 견디지 못하고, 보름 넘게 장악하였던 충주성을 버리고 근거지인 제천 지역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나 10개 남짓한 인근 고을의 지방관을 쫓아내거나 베어 버리고 수성장을 임명하여 광대한 해방구를 건설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영남 지역에 서상렬 부대를 내려보내 영남의 여러 고을 의병을 결속시켜 항일 전선에 서게 하였으니, 이로써 제천의병은 그 이름을 전국에 떨치게 되었다.

제천의병이 근거지를 중심으로 장기전에 들어가자 일본군은 보급로를 끊으려 하였다. 가흥과 수안보에 있었던 일본군의 병참은 물길과 뭍길을 가로막고 나섰다. 특히 가흥의 일본군 병참은 남한강 물길을 이용한 수송수단에 의존하고 있던 제천 일대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가하였다. 식량과 소금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이런 국면을 호전시키고자 제천의병은 적극적인 공세에 다시 나섰다. 충주 쪽의 적을 방어하고 있던 후군장 신지수, 좌군장 우기정과 우군장 안성해 등으로 하여금 선봉장 김백선과 함께 가흥을 공략하게 하고, 이강년의 유격군을 수안보·조령 일대에 보내어 영남 지역에서 소모장 활동을 하던 서상렬의 부대와 협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여러 장수가 공동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증폭되었다. 그 결과, 봉기 초부터 의진을 이끌어 왔던 선봉장 김백선이 희생되는 사건이 있었다.

한편, 정부는 아관파천 이후 친러시아 내각의 수립을 계기로 집요하게 의병해산을 촉구하였다. 강화 진위대장 장기렴은 병력을 이끌고 충주 쪽으로부터 들어와서 왕명을 내세우면서 의병을 해산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제천의병은 완강히 해산을 거부하면서 제천 인근 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후 한 달 넘도록 관군과 의병은 대치상태를 지속하였다. 소규모 전투와 함께, 서신을 통하여 의병의 해산을 촉구하고 거의의 명분을 천명하는 공방이 계속되었다. 그동안 제천의병은 영남으로 근거지를 옮기자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물자부족에 시달렸다.

결국, 4월 13일(5. 25)에 장기렴의 군대가 청풍 쪽으로부터 제천으로 쳐들어왔다. 제천의병은 독송정·남산·수도산 등의 요새지를 구축하고 맞서 싸워 관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갑작스런 비바람으로 의병들의 화승총이 기능을 잃게 되자 관군은 제천을 일거에 장악하였다. 남산성에서 전투를 독려하던 중군장 안승우와 종사 홍사구는 피신하지 않고 감연히 의를 부르짖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제천을 상실한 유인석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인근의 군현을 전전하면서 관군과 부딪쳤지만, 한번 기울어진 형세는 만회할 길이 없었다. 결국, 유인석은 정선에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의병봉기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서행 길에 올랐다. 본래 의도는 서북 지역에서 용감한 용사들을 모집하여 재기하려는 것이었으나 일이 뜻같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에 압록강을 건너 의병을 해산한 유인석은 도맥을 계승하고 복수의 날을 준비하는 새로운 과업에 몰두하였다.

을미 의병이 해산된 후, 일제의 침략은 더욱 노골화하였다. 특히 친일세력을 동원하여 일진회를 조직하여 앞장서도록 하였다. 의병에 가담하였던 제천의 의병론자들은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결속을 다지고, 때로는 위정척사적 성향을 강하게 띠는 향약운동을 통하여, 또는 비밀 결사체를 구성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후, 강제된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은 잠재하고 있던 의병들이 일시에 들고 있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을미의병 당시 유격장이었던 이강년의 봉기가 대표적이다. 해산된 원주 진위대에서 무기를 받은 수많은 의병장들, 해산병 출신의 의병들도 일시에 제천으로 모여들었다. 다시 제천은 의병천하가 되었다.

천남 전투에서 일본군 1개 소대를 격퇴한 의병진은 주천으로 이동하여 체제를 정비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강년은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니 7월 11일(8. 19)의 일이었다. 일본군은 제천에 불을 질러 의병의 근거지를 완전히 초토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강년은 이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활발한 의병활동을 벌여나갔다. 특히 산악전에 능하였던 그는 끊임없는 이동과 기습으로 일본군 부대를 공격하였다.

그의 활동무대는 사군(四郡)은 물론이요, 영월·원주 등 강원도 영서 지역, 그리고 영남 북부지역을 포함하는 광범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때는 경기도 양주까지 진출하여 서울입성을 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토벌이 심해지면서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강년은 의병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던 호남 쪽으로 나아갈 꿈을 안고 제천 일대로 이동하였다.

남쪽에 남아 활동하던 그의 동료와 합하여 경북 북부 지역에서 전개된 서벽·재산 전투는 그가 지휘한 최후의 대규모 전투였다. 그 후 이강년은 병력을 정비하려고 다시 제천 쪽으로 이동하였다가 1908년 6월 4일(7. 2)에 청풍 금수산에서 일본군·순사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강년의 순국은 제천의병의 끝이 아니었다. 이강년과 연대하며 항일활동을 해나가던 수많은 의병부대가 있었으며, 이강년의 동지였던 김상태도 제천의병의 서슬 푸른 깃발을 나라가 망한 이후까지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저항 정신은 그들이 순국한 이후에도 땅에 묻히지 않았다. 일찍이 제천의병의 지도자 유인석에 의해 시도되었듯이 국외에서의 무장투쟁으로 계승 발전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구완회(세명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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