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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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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면(寒水面)

【면】제천시 행정 구역 1읍 7면 9개 동의 하나. 고구려 시대에는 사열이현(沙烈伊縣=청풍) 일부에 속하였으며, 신라 때에는 면내 탄지리에 부곡을 설치한 바 있고, 고구려 때는 황강원(黃江院)과 역(驛), 동창(東倉-송계리), 서창(西倉-서창리)을 두었음. 근세조선 때에는 청풍군(淸風郡) 서쪽에 있으므로 원서면(遠西面)이라 하여 복평(洑坪), 노탄(蘆灘), 역리(驛里), 한천(寒泉), 서창(西倉), 덕곡(德谷), 황강(黃江), 증산(甑山), 월악(月岳)의 9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충주군(忠州郡) 덕산면(德山面)의 송계리(松界里)를 편입하면서 증산, 월악 2개 리를 덕산면에 넘겨주었음. 황강리에 소재한 한수재(寒水齋-권상하 선생 등을 모신 사당)의 이름을 따서 한수면이라 하여 제천군에 편입하고 서창(西倉), 황강(黃江), 한천(寒泉), 역리(驛里), 북노(北老), 상노(上老), 덕곡(德谷), 탄지(炭枝), 복평(洑坪), 송계(松界)의 10개 리로 개편 관할하다 1929년 10월 14일 수하면(水下面)의 호운(好雲), 한암(咸岩), 명오(鳴梧), 사기(沙器), 서운(瑞雲), 포탄(浦灘)의 6개 리를 편입하여 16개 리가 됨. 동쪽은 덕산면과 청풍면, 서쪽은 충주시 살미면, 남쪽은 충주시 상모면, 북쪽은 청풍면과 충주시 동량면에 접하고 있음. 1980년 4월 1일 제천읍의 시 승격에 따라 제원군 한수면이 됨. 1985년 충주댐 건설로 16개 리, 13.42㎢가 수몰되어 면소재지를 송계리로 옮김. 이 때 949세대, 4,058명이 정든 고향을 떠나 이주하였음. 1987년 1월 1일 수몰지역인 사기, 명오, 서운, 포탄, 함암, 호운 등 6개리가 충주시(당시 중원군)로 편입되어 송계1, 2, 3, 4리와 탄지, 덕곡 등 6개 리만 남게 됨. 1991년 제원군을 제천군으로 개칭함에 따라 제천군 한수면이 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폐합에 따라 제천시 한수면이 됨.

덕곡리(德谷里)

[덕실, 덕곡]【리】 본래 청풍군(淸風郡) 원서면(遠西面)의 지역으로서, 유덕산 밑이 되므로 덕실 또는 덕곡(德谷)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다시 덕곡리라 하여 한수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한수면 덕곡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 마을 일부가 수몰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한수면 덕곡리가 됨. 충주에서 단양방면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서창을 막 지나 봉화재를 오르는 구불구불한 길의 좌우에 덕곡리가 있다. 논보다 밭이 많은 마을이라 밭작물인 고추, 마늘 잎담배 등의 특수작물이 많이 생산되던, 인심이 후덕한 마을이다. 또한 산이 깊고 물이 좋아 더덕, 두릅, 고사리 등의 산나물과 청출, 백출, 봉령 등의 산약재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36번 국도가 이 마을을 관통하는 교통의 요지였으나 충주댐 수몰로 36번 국도가 덕산면 수산리 방면으로 우회 개설되어 기존의 국도는 리간 도로로 격하되면서 산나물이나 산약재 채취객들만 간간히 들리는 한적한 마을이 되었다. 갈나무-재이【마을】 지소거리 동쪽에 있는 마을. 갈나무가 많았음. 골-안 [곡내」곡내(谷內)【마을】지소거리 남쪽 골짜기 안에 있는 자연부락으로 곡내(谷內)라고도 부름. 굴아우-다리【교량】충주에서 단양으로 이르는 36번 국도 상에 있던 다리로 현재는 수몰되었음. 꼬부랑-재【고개】덕산면 신현2리와 고산사에 이르는 꼬불꼬불한 고개. 덕-고개【고개】상서창 가촌서 양지말로 넘어오는 고개. 덕-곡(德谷)[덕실]【마을】→ 덕곡리 전체 자연부락의 통칭으로 「덕실」이라고도 부름. 덕곡-분교【학교】1954. 4. 1서창국민학교로 설립 되었으나 ·84년 충주댐 건설로 덕곡리로 이전, 1984년 1월 1일 덕산면 신현리의 유덕국교 분교로 폐합되어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통학하다 폐교됨. 현재는 서울의 성락교회에서 매입 교회 시설로 운영하고 있음. 덕성(德城)【마을】덕곡 서남쪽 유덕산 성터 아래 있는 지명. 딱밭-골 [저곡](楮谷)【마을】 음지말 동쪽에 있는 지명으로 닥나무가 많아서 불리우게 된 이름으로 저곡이라고도 부름. 말-등【고개】지소거리에서 골안으로 이르는 작은 고개. 망다리-재【고개】딱밭골서 수산면 고명리로 넘어가는 고개. 매방아-터【터】골안 입구에 있는 연자방아 터. 머우-골 [오곡](梧谷)【마을】딱밭골 동남쪽에 있는 지명. 머위나무(오동나무)가 있었음. 오곡(梧谷)이라고도 부름. 모종-터【터】골안 마을 입구에 큰 밤나무가 있었고 그 밤나무 아래 모종이 있어 한문 서당과 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했었음. 봉화-재(烽火-峙)[봉우-재]【고개】【마을】수산면 오티리와 덕산면 신현리의 경계지점의 고개이자 4~5호가 살던 마을로, 산 정상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어 붙여진 이름임. 흔히 쉽게 「봉우재」라 부르기도 하며, 3개 면(面)의 접경이다 보니 봉화재 사람들은 집은 덕산면에 짓고 살며, 물(샘)은 수산면 물을 먹고, 용변은 한수면에서 본다는 우스개 말이 있음.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4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폐허로 방치되어 있음. 삭-다리【교량】충주에서 단양으로 가는 36번 국도상의 서창 방면에 있던 다리로 지금은 수몰되었음. 산신당【당집】매년 정월 초2일 저녁에, 평소 심신을 정갈하게 지낸 제주와 제군들이 입산하여 고사 준비를 하고 3일 첫 새벽에 고사를 지냈음. 서낭당【당집】덕곡에는 자연부락 단위로 3개의 서낭당이 있어서 매년 정월 초4일 저녁에 당고사를 지냈음. 쇠시릿-재【고개】 골안 남쪽에서 탄지리로 가는 고개. 쇠가 났다함. 양지-말 [양지-촌](陽地-村)【마을】 덕곡 서쪽 양지편에 있는 마을로 현재는 수몰되었음. 음지-말 [음지촌]【마을】 갈나무재이 동쪽 응달쪽에 있는 마을. 지소-거리(紙所巨里)【마을】양지말 동남쪽 길가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 종이를 만드는 지소가 있었음. 천지당【당집】서낭당과 함께 매년 정월 초4일 저녁에 고사를 지냈음 호미실 재【고개】청풍면 연론리로 넘어가는 고개.

복평리(洑坪里)

[붓두들기, 보평]【리】본래 충주군(忠州郡) 덕산면(德山面)의 지역으로서, 두둑에 보(洑)를 막았으므로 보평 또는 봇두둑이, 보뜨들기 등으로 불리워 오다 한자의 보(洑)가 복(보 막을 복, 스며 흐를 복)으로도 발음되므로 복평으로 불리우게 됨. 본래 충주군(忠州郡) 덕산면(德山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복평리라 하여 한수면(寒水面)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읍의 시 승격에 따라 제원군 한수면 복평리가 되었으며,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수몰마을이 됨. 1991. 1. 1 제천군 한수면 복평리를 거쳐, 1995. 1. 1시?군 통폐합에 따라 제천시 한수면 복평리가 됨. 한수면 소재지에서 송계리 방면으로 한천, 역리, 북노, 상오리를 거쳐 구정벼루를 돌아서면 동달천과 광천?성천의 합수 물이 다시 합수하는 모듬내가 있어 이 모듬내를 향해 뱃머리를 들이대고 있는 형국을 한 마을이 복평리다. 송계리의 형석광산을 드나들던 광산길이 있는 새터말과 본마을인 봇두둑이 마을로 되어 있는 이 마을은 복평국민학교가 있었으나 충주댐 수몰로 덕산면 수산1리 뒷동산으로 옮겨가고, 마을은 완전히 물에 잠기고 말았다. 물에 잠긴 마을을 위로라도 하려는 듯이 입구에 충주호 유람선 선착장인 월악나루가 들어서더니 이 또한 수지타산을 이유로 약 1km 하류인 충주시 관내로 이전해 가고 빈 건물만 서글픈 마을의 운명을 하소연하려는 듯 을씨년스럽게 서서 바람을 맞고 있다. 현재 거주하는 가구와 인구는 전혀 없고 행정리동도 폐쇄되었으며 법정 리동의 명칭만 남아있다. 광대-소(-沼)【하천】송계리로 가는 하천에 광대들이 임시 머물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소. 구정-벼루【벼루】한수면 상노리에서 복평리에 이르는 모듬내 바로 아래(구 충주호 관광유람선 월악나루 부근) 있는, 길이 약 400m의 벼루. 꼬부랑-길【고개】탕건바위 위 진등 능선에 나 있는 고갯길. 도끼-산[도꾸-산]【산】새터 서북쪽 모듬내 아래 하천을 감싸안고 있는 기암절벽의 산으로, 그 기암절벽이 도끼 날을 닮았다 하여 도끼산이라 불리우게 되었음. 일명 도꾸산이라고도 함. 두루미-재【고개】마을 뒤편 남쪽 급경사를 올라 위치한 고개로 보덕암(普德庵)과 월악산을 오르는 통로임. 모듬-내[합수-머리](合水-)【하천】덕산면 문수봉으로부터 발원한 성천이 덕산면과 경북의 경계에 있는 대미산으로부터 발원한 광천과 덕산면 수산2리에서 만나 흐르다 송계리를 거쳐 흐르는 동달천과 합수하는 곳으로 고기가 많고 경관이 빼어나 인근 마을의 천렵 및 소풍 장소로 많이 애용되었었음. 뱃-재【고개】새터말의 서남쪽, 도끼산과 송계리의 접경에 있는 고개로 송계나 복평에서 충주시 살미면 공이동으로 가는 통로임. 벼락-소【하천】송계리로 가는 하천에 있으며 옛날 벼락이 떨어졌다 하여 벼락소라 불리우게 되었다 함. 복평(洑坪)[보-평][봇두둑이][보뜨들기]【마을】「보평리」라고도 하며 봇두둑이, 보뜨들기 등으로 부리우는 자연부락의 총칭. 복평국민학교【학교】한수면 복평리 207번지에 있던 초등학교로, 1954년 4. 1승인되어 송계국민학교 복평 분교로 1~3학년까지의 학생을 교육하다 1958년 4. 1본교로 승격 개교함. 교지(校地 총 11,118㎡ 중 운동장이 4,125㎡로 아담한 학교였으나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수몰이 되어 덕산면 수산리 산 833-2로 옮김. 농촌 학생 수의 급격한 감소로 유덕초등학교 분교로 되었다가, 유덕초등학교 또한 덕산초등학교 분교로 되면서 복평국민학교는 완전히 폐교되어 버림. 현재 수산리의 학교 건물에는 기독교계의 수련원이 운영되고 있음. 상투-바위【바위】새터에서 송계리로 가는 하천변에, 마치 어른들의 상투를 틀어놓은것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큰 바위. 새-터 [신기](新基)【마을】복평마을 남서쪽에 동달천을 건너 뒤 늦게 조성된 마을. 서낭당【당집】매년 정월달에 날을 받아 동네 고사를 지내던 곳으로, 새터말에서 송계리로 가는 길 옆 좌측편 전나무 숲 속에 있었으나 80년도 산림 내 불법 건축물 일제 정리 때 철거해 버렸음. 싸리지실기【지명】새터에서 송계리로 가는 경계 지점. 옥병-다리【지명】뱃재 아래, 새터 서남쪽 냇가에서 뱃재 쪽 위로 150m쯤 되는 지점의 절벽에 옥처럼 희고 호로병 같이 둥근 것이 박혀있어 사람들이 옥병이라 부르며 그 옥병이 있는 부근이라 하여 이 일대를 옥병다리라 부름. 옷갓-봉【산】송계리로 가는 길 좌측에 있는 작은 산. 용-바위【바위】새터말과 본동(봇두둑이) 사이 동달천(東達川) 가운데 있는 바위. 용바위-소【하천】용바위에 있는 소. 재골-모퉁이【계곡】봇두둑이 마을 뒤 능선으로하여 보덕암에 이르는 골짜기. 진-등【고개】탕건바위 위에 있는 능선. 탕건-바위[탕간-바위]【바위】마을의 동쪽 냇가의 기암절벽에 두들어지게 솟아오른 높이 50여m, 둘레 40여m의 큰 바위로 마치 머리에 쓰는 탕건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임. 흔히 쉽게 「탕간바위」라고 부름 풍기-산【산】송계리와 복평리의 경계에 있는 산.

북노리(北老里)

【리】 본래 청풍군 원서면(遠西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중로리(中老里) 와 하로리(下老里)를 병합하여, 노탄리(老灘里)의 북쪽이 되므로 북로리라 해서 한수면에 편입됨. 1980년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한수면 북노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건설로 완전 수몰 마을이 됨. 1987. 1. 1 제천군 한수면 북노리가 되었다가 1995. 1. 1 시군 통합에 따라 제천시 한수면 북노리가 됨. 하천을 중심으로 위로는 상노리, 아래로는 역리와 인접한 북노리는 연안이씨 집성촌으로 그 문중에서 의병활동을 한 지사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수몰 전 행정구역으로는 제천군에 속해 있으면서도 생활권은 충주와 가까워 중요한 생필품 따위를 충주에서 구입하고 농산물 또한 충주에다 내다 팔았다. 한수가 수몰되기 전 황강장이 번창할 때는 농산물 수집상인들이 이 마을까지 올라와서 덕산면 수산리, 한수면 송계, 복평, 탄지, 상노리 방면에서 장을 보러 오는 장꾼들을 잡아 이곳 길거리에서 흥정을 하기도 하였다. 마을 앞을 흐르는 상한강(달래강)을 경계로 건너편은 충주시 살미면이며 충주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넓은 들이 펼쳐진 곡창지대였다. 마을 뒷산에는 유달리 산약초가 많이 났었으며 토질 또한 비옥하여 여러 가지 농작물이 잘 되기로 유명하였다. 감박-소【소】공말과 불당골 사이의작은 소로, 겨울철에는 따뜻한 물이 솟아나 얼지 않으므로 아낙들의 빨래터가 되었었음. 개식-골【골짜기】불당골 마을 뒷 산속에서 흐르는 골짜기 골-말【마을】불당골 마을에서 동쪽으로 난 계곡이 흐르는 지역 곰니미【골짜기】불당골 마을 동쪽 골안 계곡으로 올라 가장 깊은 안천에 있는 골짜기 공-말[하-노탄]【마을】북노리와 역리 사이의 하천변에 길게 조성된 자연부락. 구정벼루-뜰【들녘】상노리의 구정벼루로 가는 길 주변에 펼쳐진 뜰 느티-나무【거목】공말에 있던 거목으로 평상시 시원한 그늘을 지어주어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으며, 얼마나 오래 된 나무인지는 아무도 모르나 거대한 몸통 속이 비어 아이들이 들낙거리며 놀기도 하였음 달-돋이【산】마을 동편 질마재 아래 있는 산봉우리로 달이 뜨면 가장 먼저 비췄다 하여 달돋이라 불렀음. 당축말[봉화-뚝]【마을】공말의 조개소 부근에 있덤 자연부락 명칭으로, ‘봉화뚝’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충주의 대림산 봉화와 신호를 주고 받았다고 전함. 대장간-거리【지명】마을 앞에 있던 대장간 터 덕-골【골짜기】불당골 마을 동쪽 계곡을 오르면 안천에 방아골 위로 흐르는 골짜기 뒷-솔밭【지명】마을 뒤에 있던 솔밭으로 앞솔밭과 함께 아이들의 놀이터로 이용되었었음. 등곡-산【산】장자봉이 있는 원 줄기의 산. 딸-골【골짜기】불당골 마을 앞과 달돋이, 필봉 뒤로 흐르는 골짜기 미내-골【골짜기】불당골 마을 동쪽에서 딸골 사이로 흐르는 골짜기 방아-골【골짜기】불당골 마을에서 동쪽 계곡을 오르다 우측으로 조기족골 위에 있는 작은 골짜기 버래뜰-보【보】공말 마을 앞에 있던 보. 봉천지기-뜰【들녘】마을 앞에 있던 뜰 불당-골 [중노리]【마을】①하노탄과 상노탄의 사이에 있는, 북노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 ② 불당골에서 동쪽으로 계곡을 오르면 가장 안천 좌편에서 흐르는 작은 골짜기로 옛날에는 이 곳에 불당(佛堂)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음. 사기부처-골【골짜기】불당골 마을 동쪽 계곡을 오르다 좌편 불당골 골짜기 아래서 흐르는 작은 골짜기 상-노탄【마을】불당골을 중심으로 윗쪽에 있는 마을. 성황당【당집】마을 앞 어귀 시뭇잎나무 고목 숲에 돌무지로 되어 있었다. 마을에서 그 해 뽑은 제주가 가가호호 거둔 쌀로 제물을 장만하여 제를 지냈는데, 당집 안에는 짚으로 만든 제웅을 비치하고 동고사를 전후하여 성황당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렸다. 수용목-보【보】마을 앞 개울에, 충주시 살미면 수용목 마을과의 사이에 있던 보. 숨통-바위【바위】마을 앞개울에 있던 바위로 곁에 소가 있어 아이들이 멱 감다 뛰어 내리며 놀기도 하였다. 시루-바위【바위】앞 개울에 있던 시루 모양을 한 바위 아랫-말【마을】불당골 마을의 한 자연부락으로, 어덕말과 대비되어 아래쪽에 있던 마을 앞-개울【하천】잔 자갈로 덮인 앞 개울에 여름이면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이 자리를 깔고 밀린 잔일도 하며 잠을 자기도 하였다. 앞-솔밭【지명】마을 앞에 있던 솔밭으로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애용되었음 언덕-말【마을】불당골 마을의 한 자연부락으로 언덕진 곳에 위치하였음. 요강-바위[꼰두-바위]【바위】앞 개울에 있던 바위로 요강을 엎어놓은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일명 꼰두바위라고도 하였음 은행-나무【거목】마을 한가운데 있던 거목으로 2그루가 있었는데 한 나무는 숫나무였기 은행이 열리지 않았지만 한 나무는 암나무로 해마다 몇 가마니의 은행을 수확하였음 장자-봉【산】마을 뒤에 있는 산으로 등곡산의 한 부분이 되는 봉우리. 잿-말【마을】공말에 속한 자연부락으로, 당축말 위에 있던 마을. 조개-소【소】둘레 200여m에 깊은 곳은 3m가 넘을 정도의 커다란 소가 있어 마을 사람들의 멱 감는 장소로 애용되었다. 조기족-골【골짜기】불당골 마을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를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미내골 위에 있는 작은 골짜기 질마-재【고개】마을 동편의 골짜기 부근에 있는 고개로, 한수면 상탄지로 가는 길목인 중치재에 이르는 지름길이 있었음. 징검-다리【교량】마을 앞 상한강에, 신당리 방면으로 건너다니는 길목에 놓은 돌다리로 규모가 커서 150개 정도의 돌을 가즈런히 놓아 만들었다. 장마 때마다 떠내려가 그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부역으로 새로운 돌다리를 놓았다. 큰들-보【보】마을 앞 개울에 있던, 큰 들에 물을 대던 보 필-봉【산】마을 앞 달돋이 곁에 있는 산봉우리로 붓끝과 같이 생겼다하여 불리워진 이름임. 하-노탄(下老灘)[공-말]【마을】불당골 아래 쪽에 있는 마을. 홰나무【거목】마을에 2그루의 홰나무가 있었다. 한 그루는 언덕말에 있던 수령 수 백년 묵은 고목으로 단오 때엔 그네를 매어 동민 전체가 그네를 뛰기도 하였다. 또 한 그루는 아 랫말 개울 가에 있었으며 역시 고목나무였다.

상노리(上老里)

[상로]【리】 본래 청푼군 원서면(遠西面)의 지역으로서, 노탄리의 위가 되므로 상로(上老) 또는 상로리(上老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다시 상로리라 해서 한수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한수면 상로리가 되었고, 1985년 충주 댐 수몰 마을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으로 제천시 한수면 상로리가 됨. 갈 여울 [노탄]【마을】상로 서쪽에 있는 여울. 노탄(蘆灘, 老灘, 露呑)【마을】→ 갈여울. 노탄리(蘆灘里, 老灘里, 露呑里)【마을】 노탄 옆에 있는 마을. 배나무-배기【마을】상로 동쪽에 있는 마을. 배나무가 있었다함. 상-노(上老)【마을】→ 상로리. 성주-곡 [성주곡]【마을】→ 승주골. 승주 골 [성주곡]【마을】→ 상로 동남쪽에 있는 마을.

서창리(西倉里)

[서창, 원리]【리】 본래 청풍군 원서면(遠西面)의 지역으로서, 조선 시대 원집 논양원(論陽院)이 있었으므로 원리(院里)라 하다가, 서창(西倉) 옆이 되므로 서창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서창리라 하여 한수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한수면 서창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건설로 마을전체가 수몰됨. 가촌-리(加村里)【마을】→ 덧말. 논양원-터(論陽院-)【터】 서창에 있는 원집 터. 조선 시대 논양원(論陽院)이 있었음. 덧말 [가촌리]【마을】 주막거리 북쪽에 있는 마을. 명-산(名山)【산】 서창 서쪽에 있는 산. 서낭당이 있는데, 매우 영검하여 부정한 짓을 한 사람이 이 산에 오르면 반드시 몸에 상처를 입는다 함. 밤나뭇-골 [율동]【마을】 안텃말 북쪽에 있는 마을. 배나굼치¹【모롱이】 서창 서북쪽에 있는 산모롱이. 전에 배가 이 곳까지 드나들었다 함. 배나굼치²【버덩】→ 아랫섬. 상명오-나루¹(上鳴梧-)【마을】 상명오나루 부근에 있는 마을. 상명오-나루²(上鳴梧-)【나루】서창 서쪽에서 명오리의 상명오로 건너가는 나루터. 새-터 [신기]【마을】 서창 북쪽에 새로 된 마을. 서창(西倉)【마을】→ 서창리. 서창-터(西倉-) [창집터]【터】 서창 북쪽 길가에 있는 창터. 옛 청풍현(淸風縣)에 딸린 서창이 있었음. 조선 말엽에 창집을 고쳐 공민학교로 썼다가, 6.25 사변 때 부서져 헐리었으며, 그 자리에 초등학교 사택이 세워졌음. 숫갓-재【고개】 서창 남쪽에서 덕산면 월악리 숫갓으로 가는 고개. 신기(新基)【마을】→ 새터. 아랫-섬 [배나굼치]【버덩】배나꿈치 위에 있는 버덩. 물이 양쪽으로 흘러 섬처럼 되었는데, 웃섬 아래가 됨. 안-덧말【마을】 덧말 안쪽에 있는 마을. 용초【소】 서창 북쪽 강가에 있는 소. 가마솥처럼 패어 있는데.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 함. 가뭄에 기우제를 지냈음. 용추-거리【내】 서창 북쪽에 있는 내. 근처에 용초가 있음. 웃-섬【버덩】 서창 북쪽에 있는 버덩. 물이 양쪽으로 흘러 섬처럼 되었는데. 그 위쪽이 됨. 원-리(院里)【마을】→ 서창리. 율-동(栗洞)【마을】→ 밤나뭇골. 이부사-비(李府使碑)【비】 서창리에 있는 청풍 부사 이 훈재(李暈載)의 청덕 선정비. 장자-골 [장자동]【마을】밤나뭇골 북쪽에 있는 마을. 전에 장자가 살았다 함. 장자-동(長子洞)【마을】→ 장자골. 주막-거리(酒幕--)【마을】새터 동쪽 길가에 있는 마을. 조선 시대 관행 길 엎이어서 주막이 많았다 함. 창집 터【터】→ 서창 터. 황개【마을】 서창 북쪽에 있는 마을. 황공탄 옆이 됨. 황공-탄(惶恐灘)【여울】 서창 북쪽에 있는 여울. 위아랫 여울로 되었는데, 큰 물결이 쏜살 같으며 아랫여울을 지나서 옹초를 이룸. 물 밑에는 반석이 깔려 있으며 가뭄에 기우제를 지냄.

송계리(松界里)

[송계동]【리】 본래 충주군(忠州郡) 덕산면(德山面)의 지역으로서,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내가 흐르므로 송계동(松界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송계리라 하여 제천군 한수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한수면 송계리가 되었다가,1985년 충주 댐 수몰 이주 때 한수면의 소재지가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가 됨. 계림암(鷄林岩)【바위】 송계리에 있는 바위. 골-미 [동산]【마을】사장 동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구-골【골】송계리에 있는 골짜기. 임진 왜란 때 구씨(具氏)가 이 곳으로 피란하였다 함. 국립공원 월악산【산】해발 1097m 의 고봉준령 웅혼장대한 남성적 산으로 영봉(靈峰), 중봉(中峰), 하봉(下峰) 으로 이루어짐. 월악산의 등산로는 크게 두방향임. 송계리에서 약 2시간 덕산면 월악리에서 약 3시간 정도면 정상에 오름. 정상에 오르면 충주. 제천, 이천 장호원까지 육안에 들어온다고 함. 구랫-골【마을】 벌뜰 서쪽에 있는 마을. 구룡-소(九龍沼) [영운담]【소】사자빈신사 터 앞에 있는 소. 아홉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 함. 권희열 고가(古家) 【문화재】명오리에서 수몰로 인하여 1983년 송계로 옮겨온 고가. 조선 시대 목조 가옥. 지방민속자료 5호(1976년 지정) 김세균 가(金世均 家)【문화재】북노리에서 수몰로 인하여 1983년 송계리로 이전함 전 이조판서 김세균의 집으로 사랑채만 남음 조선 말 목조 가옥 기억 (ㄱ) 자집 8짝 기와 1동. 남-문(南門)【고적】 사장 남쪽에 있는 덕주산성의 남문. 높이 6m 너비 7.5m의 두 돌 기둥이 문처럼 양쪽에 서 있음. 덕주-곡(德周谷)【골】→ 덕주골. 덕주-골 [덕주골]【골】→ 벌들 남쪽에 있는 골짜기. 덕주사로 가는 길 어귀가 됨. 덕주-사(德周寺)【절】동문 서북쪽 월악산에 있는 절. 법주사(法 住寺)의 말사로서 옛날 덕주 부인이 세웠다 하는데, 6.25때 소실되고 부도 2기 석조물이 남았는데 1964년 다시 세움. 덕주사 서쪽 산기슭에 부도군(浮屠群)이 있는데 유적당(幼寂堂), 부유당(浮遊堂), 용곡당(龍谷堂), 홍파당(洪波堂)이라 각자(刻字)가 있다. 덕주산성 터(德周山城-)【터】 덕주골에 있는 옛 석성 터. 둘레 33.670척. 고종(高宗) 29년(1892)에 다시 성을 쌓다가, 갑오동학운동 때 그만 두었다 하는데, 그 때 쌓은 것으로 추측되는 동문,북문, 남문들이 남아 있음. 동-문(東門)【고적】 덕주골 동쪽에 있는 덕주산성의 동문. 높이 6m, 너비 7.5m의 두 돌 기둥이 문처럼 양쪽에 서 있음. 동산(東山)【마을】→ 골미. 동창(東倉)【마을】→ 창말. 동창 터(東倉-)【터】창말에 있는 터. 옛 충주군에 딸린 동창이 있었음. 마애-불(磨崖佛)【고적】→ 마애불상. 마애불상(磨崖佛像) [마애불]【고적】 덕주사 뒤에 있는 돌부처. 큰 바위에 새겼는데. 높이 14m 너비 5.45m 얼굴길이 3.7m 귀 길이 1.85m로 보물 제406호로 지정 보호함. 덕주사를 세운 덕주 부인이 새긴 것이라 함. 길이 14 m, 폭 5.4 m, 얼굴 길이 3.73 m, 귀길이 1.85 m, 발길이 7.5 m임. 벌-뜰【마을】 송계동 복판에 있는 마을. 들 옆에 있음. 사-동(寺洞)【마을】→ 절골. 사자빈신사-석탑(獅子頻迅寺石塔) [사자탑]【탑】사자빈신사 터 앞에 있는 돌탑, 높이 12자 2치로 아홉 층이었는데, 두 층은 무너지고 지금은 일곱 층만이 남아 있음. 태평(太平) 2년(고려 헌종 13년:1022)에 지었다는 탑의 명문(銘文)이 있고, 기단 위의 네 귀퉁이에 사자를 새긴 돌기둥이 탑신을 떠밭들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자장 율사(慈裝律師)의 좌상(坐像)을 모셨음. 1962년에 보물 제94호로 지정 보호함. 사자빈신사-터(獅子頻迅寺-)【터】덕주골 서남쪽에 있는 사자빈 신사의 터. 법화경의 ‘제불사자분신지력(諸佛獅子奮迅之力)’ 이라는 글귀를 따서 사자빈신사라 하였다는데, 세운 해는 사기(寺記)가 없어서 알 수 없으나, 고려 현종(顯宗) 때 세운 사자빈신사석탑이 남아 있음. 사자 탑(獅子塔)【탑】→ 사자빈신사석탑. 사-장【마을】덕주골 남쪽에 있는 마을. 사자빈신사터가 있음. 삼신-대이【마을】벌들 서북쪽에 있는 마을. 삼신당이 있었음. 상시-골【골】 송계리에 있는 골짜기. 임진 왜란 때 홍(洪)씨가 이 곳으로 피난하였다 함. 새텃-말【마을】 창말 북쪽에 새로 된 마을. 성석문(城石門) 【성】송계계곡의 북쪽과 남쪽 그리고 덕주계곡 을 차단하기 위하여 축조된 성으로 각 북 남 동에 문이 있어 동문, 북문, 남문이라 하며 이 밖에 덕주사를 둘러싼 상부와 성과 동문 덕주리 사이의 능선을 따라 석축한 흔적 있다. 축성 시기 미상이나 고려 고종 43년 (1256) 몽고병의 침입시 충주 사람들이 피난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원군과의 갈등으로 민비가 축성했다는 구전이 있으나 불분명하며 북문의 태극문장으로 보면 조선 말기 작품으로 추정도 된다. 문의 높이 4 m, 폭 4 m 임. 송계동(松界洞)【마을】→ 송계리. 수경-대(水鏡臺)【터】망폭대에서 500m 거리에 있음. 신라 때부터 월악신사를 설치하고 제천(祭天)했다는 전설이 전해옴. 역리석불(驛里石佛)【석불】역리에 있던 것을 수몰로 인하여 1983년 송계리 덕주사로 이전 함. 영운-담(映雲潭)【소】→ 구룡소. 와룡대(臥龍帶)【소】용이 승천했다고 용소라고도 함.용소골 맑은 물에 몸을 담그면 3년간 더위를 모른다는 구전이 있음. 월광사 터(月光寺-)【터】 사장 서남쪽에 있는 월광사의 터.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 주지였던 원랑선사(圓郞禪師)의 탑비가 있었음. 월악사 터【터】덕주서 송계로 가다가 동쪽 계곡에 원부선사탑비(圓部禪師塔碑)가 있었는데 1922년 서울로 운반되어 국립박물관 앞뜰에 보관됨(보물 360호) 이 비석에 의하면 신라 경문왕 (861-874) 때 대사의 선덕(禪德)을 듣고 월광사 주지로 임명하였다고 함. 높이 3.95 m, 비신(碑身) 2.226 m, 폭 0.97 m임. 원랑선사탑비 터(圓郞禪師塔碑-)【터】 월광사 터에 있던 원랑선사탑비의 터.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4년 (890)에 중 도통에게 원랑선사의 시호를 내리고 그의 공덕을 치하하여 비를 세움. 높이 3.95m 빗몸 높이 2.26m 너비 0.97m 거북 형상의 받침 돌은 화강암으로 되었고, 빗몸의 대석에는 운문(雲文), 안상(眼象)을 새겼으며, 비의 머리에 용이 서린 형상을 새겼음. 비에 새긴 글은 김영(金領)이 짓고 순몽(淳蒙)이 씀. 오래 되어 비의 머리가 깨어지고 빗돌이 헐어진 것을 1922년 3월 서울 경복궁으로 옮김. 월악궁-터(月岳宮-)【터】송계리 759번지에 있는 월악궁의 터. 월악산(月岳山) 아래가 되는데,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별굴으로 고종(高宗) 29년 (1892)에 짓기 시작하여 31년(1894)에 완성하였음. 1920년 10월에 헐어다가 한수 보통학교를 짓는데 쓰고. 나머지는 1944년 송계국민학교를 세우기 위해 모두 헐어 가고 사대문(四大門)만 남았음. 월악신사-터(月岳神祠-) [수경대]【터】 송계동 동쪽 월악산(月岳山)밑에 있는 사당 터. 신라 때부터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함. 고려 제 23대 고종(高宗) 43년 (1256) 몽고(蒙古) 군사가 월악산성(月岳山城)에 침입하였을 때, 별안간 천둥 번개가 치며 비바람이 쏟아지니 적병들이 놀라 월악산사의 영험이라 해서 도망갔으며, 임진 왜란 때도 이곳은 안전하였다 함. 재똥지【마을】벌뜰 동북쪽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 절골 [사동]【마을】 골미 남쪽에 있는 마을. 절이 있었음. 정번데기 골【골】 송계리에 있는 골짜기. 임진 왜란 때 정(鄭)씨가 이곳으로 피란하였다 함. 팔랑소(八娘沼)【소】하늘에서 여덟 선녀가 내려와 목욕했다는 전설이 있는 소. 창-말 [동창]【마을】재똥지 북쪽에 있는 마을. 옛 충주군(忠州 郡)에 딸린 동창(東倉)이 있었음. 학소대(鶴巢臺) 【소】 마애불로 오르는 길가 있는 소. 한훤-티 (寒喧峙)【고개】 덕주사 남쪽에 있는 고개.

역리(驛里)

[역말, 역촌, 황강역]【리】 본래 청풍군(淸風郡) 원서면(遠西面)의 지역으로서, 황강역(黃江驛)이 있었으므로 역말, 역촌(驛村) 역리(驛里) 또는 황강역(黃江驛)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역리라 하여 한수면에 편입됨. 1980년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한수면 역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 마을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한수면 역리가 됨. 덕산-골 [덕성리]【마을】 역말 남쪽에 있는 마을. 덕산 밑이 됨. 덕성리(德城里)【마을】→ 덕산골. 미륵불(彌勒佛)【미륵】 부채댕이에 서 있는 돌부처. 높이는 약 12m. 벌엣-들【들】 역말 서쪽 개울 옆에 있는 들. 부채-댕이【들】 역말 남쪽에 있는 들. 미륵불이 있음. 소쇠-바우【바위】 역말 동쪽 장자봉 밑에 있는 바위. 모양이 소의 혀처럼 생겼다 함. 역-말【마을】→ 역리. 역-촌(驛村)【마을】→ 역리. 오동-골【마을】 역말 동쪽에 있는 마을. 오동나무가 많았음. 웽잇-재【고개】→ 덕산면 수산리의 ‘왱잇재’ . 장자-봉(長子峰)【산】 역리와 황강리에 걸쳐 있는 산. 전에 장자가 살았었다 함. 정금사 터(淨金寺-)【터】 역리에 있는 정금사의 터. 오층 석탑 (五層石塔)과 앉은 돌부처가 있었는데, 석탑은 서울로 옮겨갔음. 황강-역(黃江驛)【마을】→ 역리.

탄지리(炭枝里)

[탄지, 숫갓]【리】 본래 청풍군(청풍군) 원서면(遠西面)의 지역으로서, 숫갓 또는 탄지(炭枝)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하탄지리와 상탄지리를 병합하여 탄지리라 해서 한수면에 편입됨. 고려 때 탄지 부곡(炭枝部曲)이 있었음.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한수면 탄지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 마을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한수면 탄지리가 됨. 상-탄지(上炭枝) [상탄지리]【마을】 탄지 위쪽에 있는 마을. 상-탄지리(上炭枝里) 【마을】→ 상탄지. 숫-갓【마을】→ 탄지리. 웃-말【마을】 상탄지 위쪽에 있는 마을. 중치-재【고개】→ 중리. 중-티(中峙) [중치재]【고개】 상탄지 서북쪽에 있는 고개. 덕산면에서 충주로 가는 길의 중간이 됨. 탄-지(炭枝)【마을】→ 탄지리. 하-탄지(下炭枝) [한탄지리]【마을】 탄지 아래쪽에 있는 마을. 하-탄지리(下炭枝里)【마을】→ 하탄지.

한천리(寒泉里)

[찬수깨, 한천]【리】 본래 청풍군 원서면(遠西面)의 지역으로서, 찬물이 나는 샘이 있었으므로 찬수깨 또는 한천(寒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한천리라 하여 제천군한수면에 편입됨. 1980년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한수면 한천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 마을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으로 제천시 한수면 한천리가 됨. 새-말 [신대]【마을】 한턴 동남쪽에 새로 된 마을. 신-대(新垈)【마을】→ 새말. 찬수-께【마을】→ 한천리. 토현(土峴)¹【마을】→ 흑벽루. 토현(土峴)²【벼랑】→ 흑벽루. 한천(寒泉)【마을】→ 한천리. 흑-벼루¹[토현]【마을】→ 흑벼루 밑에 있는 마을. 흑-벼루² [토현]【벼랑】→ 새말 동남쪽에 있는 벼랑.

황강리(黃江里)

[황강]【리】 본래 청풍군 원서면(遠西面)의 지역으로서, 황강(黃江)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황강리라 하여 제천군 한수면에 편입됨. 한수면의 소재지로서 관공서(면사무소, 경찰지서, 우체국, 농협, 초 중학교) 가 있었음.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한수면 황강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이 되면서 관공서는 송계리로 이주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한수면 황강리가 됨. 구-황강(舊黃江)【마을】 황강 동남쪽에 있는 황강의 원 마을. 권일원 터(權一院-【터】 황강리에 있던 원집 터. 박효자-문(朴孝子門)【정문】 황강리에 있는 효자 박연규(孝子 朴演圭)의 비. 박효자-비(朴孝子碑)【비】 박효자문에 있는 효자 박연규의 비. 서원-말【마을】황강 동북쪽에 있는 마을. 황강서원이 있었음. 수암 구택지 비(遂菴舊宅之碑)【비】황강리 112번지에 있는 수암 권상하(遂菴 權商夏)의 옛 집을 기념한 비. 충주 댐 수몰 이주 때 송계리로 옮김. 한수-장(寒水場)【장】 황강에 있는 시장 2일 7일 오일장이 섬.한수-재(寒水齋)【고적】서원말 북쪽 강가에 있던 재실. 조선 숙종(肅宗) 때 학자 학자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商夏)가 황강에 살면서 세웠음. 충주 댐 수몰 이주 때 송계리로 옮김. 한수재-부조묘(寒水齋不?廟)【사당】 황강리에 있는 한수재 권상하(寒水齋 權商夏)의 불천지위 사당. 충주 댐 수몰로 송계리에 이전함. 황강(黃江, 黃剛)【마을】→ 황강리. 황강-나루¹【마을】황강나루 옆에 있는 마을. 황강-나루²【나루】황강 동북쪽에 있는 나루터. 전에는 상선이 닿았었다 함. 황강서원 터(黃江書院-)【터】 황강에 있는 황강서원의 터. 영조(英祖) 2년(1726)에 창건하여 다음 해에 사액을 받았으며, 고종 8년 (1871)에 서원 철폐령에 의해 서원은 헐림.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수암 권상하(遂菴 權商夏),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 병계 윤봉구(屛溪 尹鳳九), 이조참판 권욱(吏曹參判 權煜)을 배향했는데. 다섯 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앞에 廟庭碑 舊宅之碑가 있었다. 수몰로 인해 83. 6 송계 2리로 이전함. 황강영당 수암사당(黃江影堂 遂庵祠堂)【문화재】→ 황강서원터(黃江書院-) 황강진리(黃江津里)【마을】→황강리. 황학사(黃鶴寺)【절】 황학산에 있는 절.

명오리(鳴梧里)

[매우재, 명오, 명오재]【리】 본래 청풍군 수하면(水下面)의 지역으로서, 매우재 또는 명오, 명오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명오리라 하여 제천군 수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29년 10월14일 한수면(寒水面)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읍의 시 승격에 따라 제원군 한수면 명오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수몰 마을이 되었고, 1987. 1. 1충주시(당시 중원군) 동량면으로 편입됨.고려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고려장 터가 발굴되기도 하였으며 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선생의 선대인 증조, 조부, 부모 3대의 묘소가 있기도 하다. 충주댐 건설 전 충주에서 버스를 타고 단양으로 향하다 보면 한수면 서창리에서 남한강 저 편으로 건너다 보이는 마을로, 남한강과 제천천이 합류하는 아래 지점에 강변을 따라 아래 윗담으로 조성된 마을이 보이는 데 이 곳이 명오리다. 오동나무가 많았고 그래서 새들이 많이 날아와 울던 곳이라 하여 명오리라 했다는 이 마을은 강변 특유의 비옥한 토질로 농사가 잘 되었는데 특히 수출용 질 좋은 잎담배가 많이 생산되었다. 가나-골【계곡】풀무골 부락에서 죽방재로 오르다 죽방재 바로 좌측편에 있는 골짜기. 느릅나무-골【계곡】풀무골과 능산골 사이로 흐르는 골짜기. 능산-골[능상-골]【마을】 하명오의 새터 위에 있는 지명으로 능상골이라고도 함. 두루봉【마을】상명오에 있는 작은 자연부락으로, 하명오에서 상명오로 오는 초입에 있었음. 두토【지명】풀무골에서 죽방재를 오르자면 죽방재 못미쳐 우측에 위치하는 곳으로 붉은 흙이 나와서 두토라고 이름하였다 하며, 이 흙은 사찰이나 사당 등의 단청에 쓰였다 함. 명오재[명오](鳴梧)[매우재]【마을】명오리의 옛 이름으로 「명오」 또는 「매우재」라고도 불렀다고 함. 배오개-재【고개】능산골과 새터의 서쪽에 있으며 충주(忠州) 방면으로 가는 고개. 옛 관행길로서 포탄리(浦灘里) 포탄나루터의 나룻배로 오가는 손님을 이 곳까지 나와 환송하였다 함. 상-명오(上鳴梧)【마을】명오리는 남한강변에 위치한 마을로 강을 중심으로 하여 볼 때 상류에 위치한 안골, 두루봉, 등 자연부락을 통틀어 일컸던 명칭임. 상-명오-나루【나루】 상명오 지역에 있던 뱃나루. 상진-말【마을】능산골에서 한수면 서운리 음달말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2가구의 작은 마을로 안동권씨 묘지기들이 주거하였다 함. 새-터【마을】 하명오의 큰 길가 서쪽에 있는 새로 된 마을. 소삼-재【고개】 안골 북쪽에서 사기리로 가는 재. 쌍-거리(雙-)【도로】상명오의 안골과 두루봉 마을에서 산으로 오르는 갈라진 길. 아굴치【마을】삼탄 지역에서 묶지 않은 낱낱의 뗏못을 거두어 들이던 곳으로 2가구가 살았음. 안-골【마을】 상명오 북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오동-골(梧桐-)【마을】큰 길가 남쪽에 있는 마을. 오동나무가 많았음. 용초(龍湫)【강】정선에서 떼목을 타고 한양을 향하는 남한강 총 여정 중 가장 위험하여 이곳만 지나면 서울에 다 왔다고 안심할 정도였다 함. 이곳은 제천천과 백운산에서 발원한 원서천의 합류천이 한수면 사기리와 명오리 사이에서 남한강과 다시 한번 크게 합류하여 이루어진 소용돌이를 막 벗어나는 지점임. 전지-골【계곡】상명오의 안골 부락에서 뒷산으로 오르는 계곡. 죽방-재(竹坊峙) [죽방현]【고개】풀무골 북쪽에 있는 고개. 옛날 황강리에서 청풍현과 제천 현으로 질러가는 길로 일명 죽방현이라고도 하였음. 고개가 높고 가팔라서 죽을 먹고는 넘을 수 없었다는 구전도 있으나 이는 죽방의 죽자가 대나무 죽자(竹字) 이지만 우리 말의 ‘죽’ 자와 연계시켜 생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음. 중-골【계곡】풀무골에서 죽방재를 오르다 보면 3개의 골짜기가 있는데 그 중 가운데 있는 골짜기. 천주-고개【고개】하명오의 풀무골에서 상명오의 쌍거리 방향으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 큰길-가【마을】명오리 중심에 있는 마을. 옛 관행길 옆이 됨. 풀무-골[풍무-골]【마을】큰길가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일명 풍무골로도 불리움. 전에 풀무를 놓았었다 함. 하-명오(下鳴梧)【마을】남한강변의 하류 지역에 있는 능산골, 새터, 오동골, 큰길가, 풀무골등 자연부락의 총칭.

사기리(沙器里)

[사그막, 사기막, 사기막리]【리】 조선말까지 사그막 또는 사기막이라 불리다가 사기로 법정리명이 되었다. 청풍군 수하면(水下面)의 지역으로서, 사기를 만들던 사기막이 있었으므로 사그막, 사기막, 사기막리(沙器幕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사기막리라 하여 제천군 수하면(水下面)에 편입되었다가, 1929년 10월 14일 한수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한수면 사기리가 되었다가, 1985년 전동이 충주 댐 수몰 마을이 됨. 사기그릇을 만들 수 있는 토질이 출토될뿐더러 사기를 굽던 사기막(沙器幕) 터가 있다. 특히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출토되는 사기류는 사기요의 제품이 일품이었다고 주민들은 자랑하고 있다. 서창에서 단양으로 가는 국도와 제천으로 가는 지방도의 분기점에서 제천쪽으로 2 ㎞ 정도 가다보면 남한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마을이 사기리이다. 사기리는 단양 청풍에서 흘러오는 남한강 본류와 백운 삼탄에서 유입되는 삼탄강 지류가 합수되는 지점으로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으로 이름이 났었다. 사기리 본동 23호 창내 30호로 법정리동이지만 호운리 20호와 통합하여 하나의 행정리동으로 관할하였다. 사기리는 밭농사가 90%이상으로 답작은 미미했지만 경지면적 호당평균 오천평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다. 사기리에는 평산 신씨(平山申氏) 연안 차씨 (延安 車氏)경주 최씨(慶州崔氏)가 많이 살았으며 특히 면단위 지방자치가 실시될 때 민의에 의하여 면의회의장으로 추대된 최종태씨를 마을의 자랑으로 여겼다. 사그-막【마을】→ 사기리. 사기-막(沙器幕)【마을】→ 사기리. 사기막-리(沙器幕里)【마을】→ 사기리. 창내【마을】사기리의 첫마을로 남한강 본류와 삼탄강의 합류되어 창내물이 흐르므로 지어진 이름.

서운리(瑞雲里)

[서른, 서룬, 서운]【리】 본래 청풍군 수하면(水下面)의 지역으로서, 서른, 서룬, 서운(瑞雲)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서운리라 하여, 제천군 수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29년 10월 14일 한수면에 편입됨. 고구려(高句麗) 때 사열이현(沙熱伊縣: 淸風縣)의 현청 소재지였다 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한수면 서운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 마을이 됨. 1987년 중원군 동량면에 이관됨. 까마우-바우【바위】 음달말 뒷 산에 있는 바위. 모양이 까마귀가 앉아 있는 것처럼 생겼다 함. 능-곡(陵谷)【마을】→ 능꼴. 능-꼴 [능곡]【마을】 서운 북쪽에 있는 마을. 동산 【산】 서운리 서북쪽에 있는 동산. 동우점 골【골】 서운 동쪽에 있는 골짜기. 동우(동이)를 만드는 점이 있었다 함. 마-목(馬牧)【고개】→ 말모기. 말-모기 [마목]【고개】→ 흑목골 서쪽에서 중원군 동량면 화암리로 가는 고개. 전에 이 곳에서 말을 먹였다 함. 문-바우【바위】 새목재에 있는 바위. 길 양쪽에 서 있어서 마치 문처럼 됨. 버섯-재【고개】능꼴 북쪽에 있는 고개. 버섯이 많음. 벼락-바우【바위】벼락바웃골에 있는 바위. 전에 벼락을 맞았음. 벼락바우-골【골】벼락 바우가 있는 골짜기. 삼성-뜰【들】 서운 앞에 있는 들. 정승 세 사람이 날 명당이 있다 함. 상선-재 [상선현]【고개】→ 상선재. 새목-재 [조항]【고개】→ 능꼴 서북쪽에서 동양면 저동으로 가는 고개. 지형이 새의 목처럼 생겼다 함. 서론【마을】→ 서운리. 서룬【마을】→ 서운리. 서운(瑞雲)【마을】→ 서운리. 서운사 터(瑞雲寺-)【터】 서운리에 있는 절터. 고려 공양왕(恭讓王)이 이 곳에 왔었다고 기록한 비가 있음. 수리-재【고개】 능꼴 북쪽에서 동량면 지동으로 가는 고개. 임진 왜란 때 이 대수(李大遂)가 의병을 일으켜 이곳에서 왜적을 무찌르다가 그의 아들 여수(汝守)와 더불어 전사하자, 그의 처 한양 조씨(漢陽 趙氏)와 며느리 전의 이씨(全義 李氏)도 순절하였음. 신선-말달니【버덩】 서운 서북쪽에 주봉산 중허리에 있는 버덩. 신선이 말을 달리던 곳이라 함. 음달-말 [음진말]【마을】 서운 동쪽 음달에 있는 마을. 음진-말【마을】→ 음달말. 점-꼴【골】음진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토기점이 있었다 함. 조항(鳥項)【고개】→ 새목재. 평지-말【마을】 서운 복판 평지에 있는 마을. 흑목-곡(黑木谷)【마을】→ 흑목골. 흑목-골 [흑목곡]【마을】→ 서운 서북쪽에 있는 마을. 충주시 동량면 지동의 흑목동으로 가는 길 어귀가 됨

포탄리(浦灘里)

[개여울, 가여울, 포탄]【리】 본래 청풍군 수하면(水下面)의 지역으로서, 개(浦) 앞에 여울이 있으므로 개여울, 가여울 또는 포탄(浦灘)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포탄리라 하여 제천군 수하면의 지역이 되었다가, 1929년 1월 14일 한수면에 펀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한수면 포탄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 마을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한수면 포탄리가 됨. 가여울¹【마을】→ 포탄리. 가여울²【여울】 포탄리에 잇는 여울. 개-여울【마을】→ 포탄리. 나무-절【마을】 포탄 서북쪽에 있는 마을. 나무절이라는 절이 있었다 함. 서운-고개【고개】 포탄 동북쪽에서 서운리로 가는 고개. 인동-산(仁洞山)【산】 개여울 뒤쪽에 있는 산. 포-탄(浦灘)【마을】→ 포탄리. 포탄-나루터 [포탄배터]【나루】 포탄 동쪽에서 충주시 살미면 목벌리로 건너는 나루터. 두 쌍의 나룻배가 있었음. 포탄-배터【나루】 포탄나루터.

호운리(好雲里)

[호운]【리】 본래 청풍군 수하면(水下面)의 지역으로서, 호운(好雲)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호운리라 하여 제천군 수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29년 10월 14일 제천군 한수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한수면 호운리가 되었다가, 제천시 한수면 호운리가 됨. 호젓한 산촌으로 법정리동이지만 가구수가 적어 행정리동 사기리에 편입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 마을이 됨. 1987년 중원군 동량면에 이관됨. 능골-고개【고개】 호운 서남쪽에서 서운리 능골로 가는 고개. 만지-고개【고개】 호운 북쪽에서 충주시 동량면 만지로 가는 고개. 오줌바위【바위】바위 쪽에서 오줌을 누어 오줌줄기가 바위를 타고 땅에 닿으면 천수를 누린다는 전설이 있음. 진목-재【고개】 호운 동쪽에서 청풍면 진목리로 가는 고개. 호운(好雲)【마을】→ 호운리. 호운-들【들】 호운 동쪽에 있는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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