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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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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정보

부서
문화예술과
이름
김학선
전화번호
043-641-5522

연곡리(淵谷里)

[모단, 연리, 지내]【리】 본래 청풍군 읍내면(邑內面)의 지역으로서, 못 안쪽이 되므로 모단, 지내(池內) 또는 연리(淵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연곡리라 하여 제천군 비봉면(飛鳳面)에 편입되었다가, 1918년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연곡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 마을이 됨. 1995년 1월 1일 제천시 청풍면 연곡리가 됨. 남-산(南山)【산】 모단 동쪽에 있는 산. 옛 청풍 고을의 남쪽이 됨. 딱밭-구랭이【마을】 모단 서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닥나무가 많았음. 모단【마을】→ 연곡리. 배밋 골【골】 연리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뱀처럼 꾸불꾸불함. 새터-말 [신대]【마을】 모단 서북쪽에 새로 된 마을. 서낭-댕이【고개】 모단 남쪽에서 신리로 가는 고개. 서낭당이 있었음. 신-대(新垈)【마을】→ 새터말. 알-봉【산】모단 서남쪽 비봉산 아래에 있는 산. 봉우리가 새알처럼 동그랗게 생김. 연-리(淵里)【마을】→ 연곡리. 은행나무【나무】수령 600년정도의 은행나무로 군보호수로 지정하고 보호하고 있음. 지-내(池內)【마을】→ 연곡리.

박달재

제천시 봉양면과 백운면을 갈라놓은 험한 산이 박달재라. 조선조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朴達)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이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다.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초초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그날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도 역시 잠을 못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았다.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새 가까워졌다.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더 묵었다. 밤마다 두사람은 만났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싸리문 앞을 떠나지 앉았다.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詩)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科場)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박달은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내 보내고는 날마다 서낭에서 빌었다. 박달의 장원급제를,그러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사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왔다.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박달은 땅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은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 안았으나 박달은 천길 낭떨어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의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두무실(杜舞洞)

제천시 봉양면 삼거리에는 옛부터 두무실이란 마을이 있다. 옛날에 중국으로부터 두씨 성을 가진 사람이 유배되어 제천에 있는 천남리에 오게 됐는데 여기 살고 있던 이씨 집에 의탁하여 살게 되었다. 이씨 집안에서는 수만리 머나먼 곳까지 흘러온 두씨를 불쌍히 여겨 극진히 대해 주었다. 두씨도 이씨 일가의 친절이 몸에 베이게 고마웠고 무슨 일이건 이씨 집안을 위해 보답해 주어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두씨는 재물이나 보화를 가진게 없으므로 명당 묘자리를 골라 이씨의 후손이 융성토록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두루 산천을 찾아 보기로 했다. 이곳 저곳 두루 돌아다니던 두씨는 봉양면 삼거리 두무실에 이르러 참으로 훌륭한 명당자리를 발견했다. 고생하며 다니다 명당을 찾아낸 두씨는 하도 기뻐서 둥실둥실 춤을 추며 좋아했다. 두씨는 이씨에게 이 자리를 알려 주었다. 이씨 문중에서는 이곳에 묘를 썼다는 것이다. 두씨가 춤을 추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무실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곳에는 현재 이씨의 묘가 있는데 그 묘가 두씨가 잡아준 자리에 쓴 묘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그렇지 않다는 사람도 있으나 여하튼 그 자리가 이 일대에서는 빼어난 명당 자리인 것만은 틀림없다는 것이

왕박(王朴) 시루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 뒷산은 왕박산(王朴山 : 왕박시루)이라 한다.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가 새로 나라를 세워 등극하자 고려의 왕족과 유신들은 뿔뿔이 흩어져 초야에 묻히거나 멀리 낙도에 은신하거나 하였다. 새 조정에서 유신을 찾아 회유하여 등용하기도 하곤 했지만 많은 왕족과 유신들은 숨어버리고 말았다. 이곳에서도 개경(開京)에서 고려 왕족이 내려와 왕박산에 은신하고 성은 박씨(朴氏)로 고치고 살았다. 낙향한 박씨는 그후 별탈없이 조용히 살았으며 자손들도 번성해 나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려 왕족인 왕씨가 박씨로 성을 갈아 살았다 하여 왕박산 또는 왕박시루라 하게 된 것이다. 또 새로 생긴 박씨 자손들을 동네 사람들을 흔히 왕박씨라 불렀다.

매바위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에 한티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다. 한티 북쪽에 봉양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한티재라 부른다. 이 한티재의 길가에 매바위가 있다. 옛날 한티마을에 부자 소리를 들으며 사는 지씨가 있었다. 원래 잘사는 집이기 때문에 손님이 끊일 날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씩 묵어가는 식객도 날마다 몇 명씩 되었다. 지씨 내외는 하도 손님이 많아 귀찮은 손님을 끊는 수가 없을까 궁리하고 있는데 하루는 스님이 지씨 대문앞에 와서 시주를 청했다. 지씨부인은 그렇잖아도 손님이 많아 괴로운 판인데 스님까지 와서 시주하라고 하니 짜증스러워 본체 만체했다. 그러나 스님은 계속 대문앞에 버티고 서서 목탁을 두드리며 돌아갈 기색이 없자 부인은 스님에게 손님이 하도 많아 먹을 것이 떨어져 스님께 드릴 곡식이 한톨도 없으니 어서 돌아가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말을 들은 스님은 한동안 우두커니 있다가 부인에게 그럼 손님이 끊어지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리까? 하고 물었다. 부인은 그말에 솔깃하여 금방 얼굴색이 달라지더니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스님은 동네앞에 있는 매 모양의 바위의 부리 부분을 끊어내라고 이르더니 홀연히 가버리는 것이었다. 지씨는 이야기를 부인에게 듣고 좋아하며 당장 사람을 데리고 매 바위에 가서 부리 부분을 부수어 놓았다. 과연 그런 뒤로는 지씨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뚝 끊어졌다. 그와 함께 가세도 점점 쇠퇴하여 가더니 마침내는 몰락하여 동네를 떠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매의 부리를 없앴으니 먹이를 먹지 못하는 꼴이 되어 결국 지씨는 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도 부리가 없어진 매 바위가 서있으나 다시 바위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다.

절골

제천시 송학면 송한리에는 절골(寺谷)이라는 마을이 있다. 옛날에 이곳에 절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인 것이다. 이 절이 폐사되게 된 전설이 몇가지 있는데 다음과 같다. 고려 고종때 몽고군이 우리나라에 대거 침입하여 조정에서는 강화도로 천도할 무렵 서울에서 난을 피하여 이곳에 온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 부인은 낮이고 밤이고 부처님 앞에 나가 불공을 드렸다. 절 근처에 살던 젊은 머슴이 이 아름다운 부인을 사모하게 되었다. 날마다 불공드리는 부인은 멀리서 엿보면서 가슴의 연정을 달래던 머슴은 어느 달 밝은밤 부인이 불공을 마치고 절 뒤편으로 바람쐬러 나온 것을 뒤를 따라가 부인에게 달려들어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얼마후 후줄그레 절로 돌아온 부인은 자기가 기거하는 방에 들어가 조용히 자진(自盡)하고 말았다.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이 절은 갑자기 온데 간데 없이 사람의 눈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부인이 기거하여 온 방이 있던 자리에선 바위가 하나 솟아 나왔다. 부인의 한이 사무쳐 바위가 생겼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리고 그 바위를 부인의 화신(化身)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바위를 설통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또 한가지 전설은 조선조 중기까지만 해도 절골에 있는 절 이름을 월명사(月明寺)라 했는데 삼십 여 명의 승려들이 불도를 닦고 있었다. 언젠가 이절에 아리따운 여인이 백일치성을 드리러 왔다. 매일 조석으로 불공드리는 여인이 정혼한 사람이 과거에 장원급제 하기를 비는 것이었다. 그런데 젊은 승려 한 사람이 미모의 여인에게 마음을 뺏겨 마침내 어느날 밤 절 뒤편에서 산책하는 여인을 범하고 말았다. 여인은 법당에 돌아와 자결하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절에서 난데없는 빈대가 꾀기 시작해 승려들이 기거할 수 없어 승려들은 절을 떠나고 상좌승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뇌성벽력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더니 산사태를 일으켜 절을 몽땅 쓸어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계율을 어긴 승려 때문에 부처님이 노하여 절을 없애 버렸다고 믿는 것이다.

뱃재(拜領)

제천시 백운면 도곡리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이궁지가 있고 방학 궁뜰에는 동경저터가 있다. 경순왕은 신라 56대 왕위에 오른지 9년만에 왕건에게 신라 천년사직을 물려주고 스스로 신하의 예를 취하였다. 왕건은 경순왕을 정승의 예로써 대우하고 신라의 옛땅을 식읍(食邑)으로 주는가 하면 자기의 딸을 취처토록 하였으나 각지의 명산을 찾아 다니다가 이곳에 이궁(離宮)인 동경저를 짓고 머물렀었다. 그러다 강원도 원주 용화산 암벽에 미륵을 조각케 하고 황산사(黃山寺)에 종을 달게 하였다. 경순왕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황산사의 스님을 시켜 종을 치게 하였다. 경순왕은 지금의 원주로 넘어가는 고개에 가 있다가 종소리가 나면 미륵불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망국(亡國)의 왕으로 천년사직과 백성에게 속죄하는 절이었다. 이 고개를 뱃재(拜領), 또 배치(拜峙)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이런일 때문이다.

옻마루

제천시 송학면 시곡리의 옻마루(漆宗)라는 동네가 나타난다. 이 동네가 생겨난 것은 이삼백년전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옻마루라고 하는 사람보다는 원마루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동네가 생기기전 이곳은 옻나무가 많은 산골이었다. 하루는 한 선비가 이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선비는 속병을 앓다가 강산이나 유람하며 좋은 약재나 구해 보려고 길을 떠나 이곳 저곳을 지나다가 마침내 여기까지 오게된 것이다. 선비는 몹시 피곤한데다 속도 불편할뿐더러 어디선가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비는 몹시 목이 마랐던터라 물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았다. 옻나무가 빽빽히 들어선 속에 바위가 있었고 그 바위 밑에서 맑은 샘물이 솟고 있었다. 선비는 기다시피하여 옻나무 사이를 빠져 샘물 옆까지 가서 입을 샘물에 대고 실컷 마셨다. 여느 물보다 향긋하고 시원하여 막혔던 속을 씻어 내리는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해졌다. 물을 마신 선비는 벌렁누워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속에 머리와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네가 내물을 마셨으니 병이 나을 것이다." 선비는 잠에서 깨어 꿈을 생각하며 또 한번 샘물을 마음껏 마셨다. 선비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는데 신기하게도 선비의 속병은 씻은 듯이 나아버렸다. 선비는 샘물 먹은 일을 얘기했다. 이것을 들은 동네 사람들 중에 속이 나쁜 사람 몇이 가르쳐 준 샘물을 찾아가 물을 마셨더니 그사람들도 병도 깨끗이 나았다. 이 소문이 이동네 저동네 퍼지자 병이 있는 사람이 수없이 찾아가 그 샘물을 마시고 속병을 고쳤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이 약수터는 약물래기라고 불리어졌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까닭에 이곳에 집을 짓고 이사를 하여 장사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얼마 안있어 동네 하나가 생겨나고 약물내기 약수터 근방은 옻나무가 많았으므로 옻마루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장금터(長琴垈)와 명암(鳴岩)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에 장금터가 있고 조금 떨어진 냇물 가운데 명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신라 진흥왕은 낭비성에서 가야사람 우륵이 타는 가야금 소리를 처음 듣고 기뻐하여 우륵에게 새로운 곡을 만들게 하는 한편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 세 사람을 제자로 삼도록 하였다. 우륵은 세 사람에게 각각 가야금과 노래와 춤을 가르쳐 주었다. 충주 탄금대에 있으면서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그리고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친 것이다. 우륵은 세제자를 데리고 장금터에 와서 거문고와 노래와 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와 계곡의 물소리와 그리고 가야금 소리가 어울려 하나의 선경을 이루었다. 우륵이 이곳을 떠난 다음에는 화창한 날씨면 냇물의 바위가 마치 우륵의 가야금을 소리낸다고 한다. 사람들은 우륵이 세 제자를 가르쳤던 곳을 장금터라 하였고 가야금 소리를 내는 바위를 명암이라 한다.

입석

제천시 송학면 입석리 서남쪽 논둑에 3미터가 넘는 돌이 우뚝 서있다. 이것이 소위 선돌배기(立石部曲)의 선돌이다. 까마득한 옛날 충주 언저리를 나돌아 다니던 마고(麻姑) 할미들이 우연하게 이곳에서 마주쳤다. 평소 사이가 나빠 서로 으르렁대던 두 마고 할미는 서로 힘자랑을 하게 되었다. 한 마고할미가 옆에 있던 큰 돌을 냅다 던졌다. 그 돌은 논 가운데로 날아가더니 땅 속에 박혀 우뚝섰다. 이것을 본 다른 마고할미가 역시 커다란 돌을 집어 들더니 앞서의 할미가 던진 곳을 향해 던졌다. 그 돌은 하늘을 날아 먼저 번에 던진 돌 위에 떨어져 두 개의 돌이 겹쳐져 하나의 돌처럼 되어 버렸다. 결국 여기서 벌린 두 마고할미의 힘내기는 승부를 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으며 마고할미는 각기 제 갈길로 가버렸다. 마고할미가 던진 돌이 입석리의 선돌이다. 지금도 이 선돌의 중간에 층이 진 것 같이 보이는데 두 개의 돌이 겹쳐 있어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도덕암

제천시 백운면 박달재 중허리 건너편 산허리 밑 계곡에 울창한 삼림과 기암절벽은 하나의 절경을 이룬다. 조금 올라가면 개울가에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다. 이 바위를 도덕암(道德岩) 또는 도둑바위라 부른다. 조선시대 태조 때의 일이다 제천 현감이 새로 부임하게 됨에 청주목에서 제천으로 떠난 현감은 충주를 지나 박달재에 다다랐을 때 일가권속을 거느린 현감의 행차는 지지부진하였다. 더구나 만삭의 부인 때문에 더욱 늦어지고 있었다. 뒤처진 현감의 부인 일행이 박달재에 들어섰을 때이다. 갑자기 한때의 도둑들이 덤벼들었다. 하인과 뒤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뿔뿔이 도망치고 말았다. 겁에 질린 현감 부인도 타고 있던 가마에서 내려 산비탈을 따라 아래로 도망치다 어느 큰 바위위에 까지 오게 되었다. 바위밑에 자갈이 깔리고 물이 흐르고 있어 더 이상 도망갈 길이 없었다. 현감 부인은 도둑에게 잡혀 욕을 보느니 차라리 개울로 뛰어 내려야겠다 생각하고 몸을 날리려는데 진통이 일어나며 그 자리에서 아기를 분만하였다. 뒤?아 오던 도둑은 이광경을 보고 그 자리에 선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내아이를 낳은 현감부인은 숨을 거두었다. 도둑은 아기를 안아 들며 자기의 소행을 뉘우치기 시작했다. 도둑은 아기를 안은 채 어디론지 가버렸다. 도둑은 자기의 죄를 속죄하고 그 아기를 자식삼아 잘 길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도둑이 악에서 벗어나 선량한 본성으로 돌아가게 한 아기가 태어난 바위를 도덕암 또는 도둑바위라고 부른다.

유선암(遊仙岩)과 거북바위

제천시 봉양면 연박리 새둑앞 개울가에 유선암이 있다. 유선암은 넓고 편편하여 물가에서 신선같이 놀 수 있어 유선암이라고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유선암 앞 물가운데에는 거북 모양을 한 거북바위가 있다. 옛날 착하고 어진 선비가 이곳 연박에 살았는데 열심히 공부하였지만 과거에 응시하면 번번히 낙방하였다. 한번은 과거에 낙방하고 유선암에 앉아 한탄을 하고 있는데 물속에서 바위가 꿈뜰꿈뜰 움직이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던 선비는 깜짝놀랐다. 그것은 바위가 아니라 움직이고 있는 거북으로 보였던 것이다. 선비는 급히 동네로 달려가 이 일을 동네 사람들에게 알렸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이 바위를 보고 이것은 동네를 지키는 거북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여기에 제단을 차리고 제를 올렸으며 마을 사람들은 극진히 거북바위를 위했다. 그 이듬해 선비는 과거에 급제를 하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더욱 더 거북바위를 위하게 되고 아기를 못낳는 여인들은 개울물이 빠져 바위가 드러나게 되면 바위에 치성을 드리게 되었다. 거북바위가 아들을 점지해 주기를 비는 것이다. 또 임신한 부인이 부른 배를 안고 여기 찾아와서 뱃속의 아기가 아들인가 딸인가 미리 점을 친다. 거북바위 밑에 뚫려 있는 구멍을 기어 나오는데 배가 밑바닥에 닿으면 딸이요. 닿지 않으면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배가 부르면 딸이요 그렇지 않으면 아들이라는 것과 통하는데 배가 얼마나 부른가를 시험하는 것이다.

용초(龍礁)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에서 남쪽으로 십리쯤 가면 억수동에 이른다. 지금부터 사백 여 년전 억수동의 한마을에 양씨 성을 가진 젊은 부부가 살았는데 산에서 약초를 캐다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양씨 부부는 비록 가난하지만 금슬이 좋아 늘 화목하게 지내지만 아이가 없어 걱정이다. 양씨부부는 산에서 약초를 캐고 내려 올 때면 으레 큰 바위 밑에서 아들을 점지해 주십사 하고 산신에게 치성을 드리곤 했다. 어느날 밤 양씨 부인은 선녀 셋이 구름을 타고 덩신덩실 춤을 추며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는데 그런 다음 태기가 있게 되었다. 양씨 부인이 잉태한지 열달이 되어 해산할 날만 기다렸으나 아기를 낳지 못하고 열두달째의 어느날 밤이었다. 남편인 양씨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양씨 부인은 계집애 세쌍둥이를 낳고 산고로 숨이 진 것이다. 양씨는 아내가 죽은 곳이 살기가 싫어서 세쌍동이를 안고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양씨가 지금의 용초폭포가 있는 곳까지 왔을 때다. 갑자기 커다란 천둥소리가 나고 불이 번쩍하더니 땅이 갈라지고 꺼지기도 하는 것이다. 땅이 꺼져내려 가면서 절벽을 이루고 그 밑에 시퍼런 물이 괸 못이 생겼다. 양씨가 넋을 잃고 있는데 물속에서 용 한 마리가 크게 울부짖으며 튀어 나와 절벽 꼭대기에 올라와 양씨가 안고 있는 세 쌍둥이를 빼앗아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세 딸은 용과 더불어 승천해버린 것이다. 양씨는 부인을 잃고 지금 또 용에게 세딸을 빼앗기게 되자.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절벽에서 몸을 날려 방금 생겨난 시퍼런 못에 빠져 죽고 말았다. 양씨가 몸을 던진 곳으로부터 아래 못을 향하여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용초와 용초폭포가 생겼다고 하고 양씨부인이 태몽에서 본대로 쌍둥이 세딸은 선녀가 되서 하늘로 올라갔고 부인은 용녀가 되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공전사(公田寺)

제천시 봉양면 공전리에는 공전사가 있었으나 삼층 석탑과 미륵불만 남아있고 암자하나가 옛날 사찰의 명맥을 이어주고 있다. 이곳을 사대동(寺垈洞) 또는 절터골이라고 부른다. 옛날 공전사가 성하였을 무럽에는 인근에 많은 신도들이 불공을 드리러 찾아왔다. 그런데 불공을 드리는 신도가 양반이면 대웅전 천장에서 명주실에 쌀이 매달려 내려오고 상민이면 좁쌀이 명주실에 매달려 내려왔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상민 한사람이 정말로 그러한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상민은 양반차림으로 가장한 다음 대웅전에 들어가 불공을 드렸더니 명주실에 매달려 내려오는 것은 쌀이 아니라 좁쌀이었다. 놀라기도 하였으나 화가 치밀어 오른 상민은 명주실을 끊어버리고 밖으로 뛰쳐 나와 마구 절을 부수어 버렸다. 이런 행패가 있는 다음 스님들은 절을 다른 산으로 옮겨 가려했으나 노한 부처님이 바닥에 딱 들어 붙어 움직여지지 않아 결국은 옮겨가질 못하였다. 그후부터 신도들이 찾는 수효가 줄어들더니 결국에는 절이 폐사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소가 지어준 무림사(霧林寺)와 무암사(霧岩寺)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 동북쪽 골짜기엔 무암사가 있다. 무림사와 무암사는 몇가지 비슷한 창사설화(創寺說話)가 있다. 통일신라때 큰 스님 의상대사가 무림사를 세우려고 금성면 성내리 산골짜기에 왔다. 의상대사는 아름드리 나무를 잘라 다듬어 목재를 만들어 힘겹게 나르고 있었다. 그나마 목재를 나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의 힘이란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의상대사가 힘겨운 일을 하며 땀을 흘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목재를 운반해 주는 것이었다. 무림사는 뜻밖에도 소가 힘든 일을 거들어 주는 바람에 손쉽게 세워졌다. 의상대사는 소를 보내 주신 것은 부처님의 공덕이라고 생각했다. 대사는 이 소를 극진히 위해 주었다. 그러나 얼마뒤에 소는 죽고 말았다. 의상대사는 죽은 소를 화장했다. 그랬더니 죽은 소의 뼈에서 여러 개의 사리(舍利)가 나왔다. 소의 불심에 감동한 대사는 사리탑을 세우고 그 속에 소의 사리를 넣어 소의 덕을 기렸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무림사를 우암사(牛岩寺)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시 오랜 세월이 흘렀다. 어느해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이 바람에 무림사 뒷산이 산사태로 무너져 내리면서 무림사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 자리에는 새로 절이 세워졌다. 새로 지은 절의 맞은편 산에는 두 개의 바위가 있다. 그런데 날씨가 맑을 때면 두 개의 바위가 희미하게 보이지만 안개가 짙게 끼는 날이면 두 개의 바위가 겹쳐서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바위를 안개바위 또는무암(霧岩)이라 불렀으며 무림사 자리에 새로 지은 절의 이름을 무암사(霧岩寺)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약간 다른 얘기로도 전해지고 있다. 첫째로 무림사를 지어준 소가 죽었을 때 죽은 소를 건너편 골짜기에 매장했다는 것이고 이 골짜기 이름을 '소두부골'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둘째, 소가 재목을 운반해 준 것은 무림사 창건때가 아니라 무암사 건립때 일이라는 것이다. 셋째, 무암사 건너편 바위를 노문암(老文岩)이라 하고 맑은 날씨에는 산과 바위가 하나로 보여 뚜렷하지 않으나 안개가 끼면 바위가 뚜렷이 보이고 그 모양이 마치 늙은 스님이 팔짱을 끼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아무튼 무림사이건 무암사이건 이 이야기가 소와 관련된 이야기인 것을 보면 소를 위하는 우리 민족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자라소

제천시 덕산면 선고리에는 다른 곳에 있는 늪과는 아주 다른 아름다운 깨끗한 물이 고인 늪이 있는데 자라소라 부른다. 이곳은 산간의 작은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집집마다 소를 기르고 있었는데 이 소들을 험한 산에 매어 먹일 수 없어 냇가나 늪가에 매어놓아 풀을 뜯어먹게 하였는데 자라소 물가에 소를 매어 두면 소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동네 사람들은 상의한 끝에 힘센 젊은 사람을 골라 늪가에 몰래 숨어있게 하고 소를 매어놓고 어떻게 되나 지키게 하였다. 해가 중천에 걸린 한낮이 되었을 때 갑자기 쏴하는 소리가 나더니 물속에서 커다란 자라가 나타나 물가의 소의 발을 덥썩 물고는 물속으로 질질 끌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달려갔지만 소는 이미 물속으로 끌려간 다음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분해서 이튿날도 소를 매어놓고 자라가 나오기만 기다렸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자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동네 사람들은 자라소라 부르게 되었다.

신랑바위,각시바위

제천시 금성면 사곡리는 옛날에 나라의 쌀을 보관하던 사창(社倉)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 동쪽에 있는 마을을 소사창 서쪽에 있는 마을을 대사창이라 한다. 사창(사곡리)은 봉양면과 이웃하고있어 서북쪽에 있는 솔티재를 넘으면 봉양면 삼거리 솔티로 빠지게 된다. 이 재를 사곡리 쪽에서 넘다보면 길 양쪽에 바위가 하나씩 서로 마주 서있는데 서쪽인 사곡리 쪽에 있는 바위를 신랑바위라 하고 동쪽인 봉양땅에서 있는 바위를 각시바위라 한다. 이 바위의 모양을 보면 마치 각시바위가 신랑바위에게 절을 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옛날 옛적의 이야기다. 사곡리에 사는 한 총각이 이웃 봉양에 사는 한 처녀와 혼인을 했다. 신랑과 신부는 금술좋게 행복한 나날을 살아갔다. 그런데 어느날 각시의 친정에서 좋지않은 소식이 날아왔다. 각시의 친정 어머니가 병환으로 위중하다는 것이다. 각시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부랴부랴 봉양땅인 친정으로 달려갔다. 각시의 친정 어머니는 각시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상을 떠났고 각시는 삼년상을 치르게 됐다그렇게 금슬좋던 신랑과 각시는 어쩔 수 없이 서로 떨어져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척이 천리라는 얘기는 이를 두고 한 말 같다. 신랑과 각시는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밤이면 밤마다 서로를 그리워 하며 님이 계신 산을 바라다 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서로를 그리워 하며 날마다 눈물로 지새던 신랑과 각시는 그리움에 지쳐 어느새 돌로 변했다. 각시는 신랑이 그리워 읍을 하는 모습을 한 채 굳어 버렸으며 신랑은 그것을 애처롭게 저으기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굳어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바위를 신랑바위, 각시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너부내 아들바위

제천시 덕산면 도전리에 너부내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앞에 흐르는 넓은 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믿어진다. 너부내를 광천이라고도 하지만 월악리에 있는 광천과 구별하기 위하여 도전광천이라 부른다. 도전광천에 아들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바위절벽 또는 바위낭떠러지라고 부른다. 옛날에 나이 지긋한 내외가 살고 있었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남편이 정씨네 집에 들어가 일을 해주고 살고 있었으나 내외가 모두 부지런하여 주인집 일을 자기일처럼 해왔으며 주인집도 한집 식구처럼 대해 주었다. 공교롭게도 일꾼부부나 주인 부부가 소생이 없어 같은 처지라 서로 딱하게 생각하고 서로 위로하며 살아갔다. 몇해후 나이 먹은 주인영감의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얼마후 주인영감도 세상을 떠났다. 정씨영감은 운명하기 전에 일꾼 내외를 불러 재산전부를 지금껏 서로 의지하고 살아온 일꾼에게 준다고 유언을 했다. 그러면서 꼭 한가지 당부하기를 어떤 일이 있어도 아이를 낳아 정씨 가문을 잇게 해달라고 했다. 주인의 전재산을 물려받은 일꾼 내외는 아이를 낳아 주인의 소원을 이뤄주는 것이 은혜 갚음이라 여기고 너부내 건너에 있는 큰 바위에 가서 날마다 치성을 드리기로 했다. 열달이 되도록 하루도 치성을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해산이 임박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밤이 이슥해서 치성을 드리러 나가는 아내가 걱정이 되어 남편이 따라 나섰다. 산간의 냇물은 금방 불어 오른다. 내외가 건너는 너부내도 가운데에선 물이 가슴까지 채였고 금시 떠내려 갈 듯 물살이 세었다. 그래도 하루도 거르지 않겠다고 약속한 치성을 그만둘 수 없어 내외는 힘을 다해 건넜다. 남편은 냇가에 남게 하고 아내는 혼자 커다란 바위까지 올라가 제물을 차려놓고 치성을 드리고 남편은 냇가에서 비를 맞으며 서서 아내를 기다렸다. 남자가 산신에게 치성드리는 것을 보면 부정을 타기 때문에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아내의 치성은 길어졌다. 아내가 치성을 드리는 동안 한꺼번에 밀어닥친 물살에 남편은 냇물에 휩쓸려 들어가 버렸다. 비가 개였고 산속의 냇물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물이 쭉 빠졌다. 냇가에 남편은 없었다. 지루해서 먼저 돌아갔거니 생각한 아내는 혼자 집으로 돌아와 다음날 아침 옥동자를 순산했다. 그런데 사내아이가 태어나서 첫 국도 먹지 않았는데 동네 사람은 냇가에서 건진 남편의 시체를 들고 대문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생명은 죽고 하나의 생명은 태어난 것이다. 그후로부터 사람들은 치성드린 바위를 아들바위라 부르게 됐다.

장락리(長樂里) 절골

제천에서 영월가는 교동 고개를 넘으면 정거랭이란 벌판이 펼쳐진다. 지금은 장락역이 생기고 벌판의 절반이 공장지대로 변했지만 정거랭이 우측 사방오지가 옛날 절터였다 하니 놀라운 일이다. 연대는 확실치 못하지만 신라 선덕여왕때라고 전한다. 오보마다 석등이요, 십보마다 불당이고 백보마다 가람(迦籃)이었다 한다. 절의 크기나 규모가 얼마나 큰 것인지는 짐작할 만하다. 본당에서 절골까지 오리 사이엔 회랑이 연이어 있어 수도승들이 눈비를 안 맞고도 수도했다 하며 사월초파일과 칠월칠석 날이면 3천여 승려가 목탁과 바라를 치고 법요식을 거행했다 하나 지금은 그 형태조차 알 길이 없지만 밭두렁 돌무지에 흩어진 기와 쪽 하나에도 신라와공들의 혼이 스며있고 이끼낀 돌덩이 속에도 석공들의 피가 맺혔으리라. 이렇게 웅장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은 어느때 소멸되었는지 알길이 없으나 눈감으면 어디선가 목탁소리 염불소리가 들리는듯 무심한 풀벌레는 세무무상이라고 한낮을 울고 있다.

팽개바위

제천시 덕산면 선고리 고목고개 남쪽 산밑에 높이 솟아 있는 바위가 있는데 이것을 "팽개바위"라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물밀 듯이 북상해 올라왔다.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끄는 일진은 경상도의 험준한 세 재들의 관문을 넘어 충주에까지 닥치게 되었다. 이때 신립장군은 전세를 가다듬고 탄금대의 한강을 배수진으로 삼아 강력한 왜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치하고 있던 가운데서도 우리 군사와 왜군과의 사이에 내기가 벌어졌다. 피아(彼我)간에 힘이 제일 센 사람을 내세워 큰 바위를 집어던져 멀리 던진 편이 이기는 것으로 하고 진편에서는 군사를 이끌고 물러가기로 한 것이다. 왜군에서 힘센 군사 한명이 나와 바위를 던졌으나 왜군 진영 바로 앞에 떨어지고 말았다. 우리 편에서 나온 힘센 장사는 큰 바위를 냅다 던졌더니 멀리 날아가 보이지 않았다. 그 바위는 날고 날아서 지금의 선고리 고목고개까지 왔다는 것이다. 이 바위가 팽개바위(投石)라는 것이다. 내기에 진 왜장 소서행장은 물러가지 않았고 신립장군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거북바위(모산동)

지금으로부터 천년이 훨씬 넘는 오랜 옛날 제천시 모산동 의림지 동편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으며 부자집 앞에는 서쪽으로 머리를 두고 동쪽인 부자집으로 꼬리를 둔 거북 모양의 큰 바위가 있었다. 부자집에는 매일같이 사람의 내왕이 많아 이집 며느리는 손님 시중에 시달려 나중에는 불평불만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엄한 시가의 가풍 때문에 자기의 고충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시주승이 찾아왔다. 이집 며느리는 쌀을 가지고 나와 시주하니 스님은 고마운 마음으로 받으며 고즈넉히 며느리 얼굴을 쳐다보니 수심이 가득했다. 스님이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묻자 며느리는 평소의 손님 시중에 고달픈 심정을 이야기 했다. 고승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그러면 집앞에 있는 거북바위의 꼬리를 밖으로 향하여 돌려 놓으면 손님이 적어질 것이라는 말을 하고는 가버렸다. 이 말을 들은 며느리는 어느날 밤 시집 식구 몰래 하인들을 시켜 거북바위를 돌려 놓았다. 그후부터는 손님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부자집은 가운이 다하여 몰락하고 말았다. 거북바위는 저수지 축대 공사로 인하여 매몰되어 지금을 없어지고 없다.

지곡(池谷)

제천시 수산면 지곡리.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서 원병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온 이여송이 이곳을 지날때다. 산간의 조그만 곳이지만 동네가 모두 잘살고 그 가운데도 만석꾼도 있어 이상하게 여겼다. 이여송은 왜군과 싸우면서도 우리나라에 인물이 나는 것을 두려워 하였으므로 이곳 지형을 자세히 살폈다. 그랬더니 이골짜기는 마치 배가 가는 행주형(行舟形)을 하고 있으며 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 냇물속에 섬이 하나 있어 배의 돛을 한 형상이라 이여송은 군사를 시켜 하룻밤 사이에 이 섬의 앞뒤로 돌을 쌓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달리던 배가 못가게 하였던 것이다. 그후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비록 돌을 쌓아서 운세가 약해졌다 하더라도 전에 만석을 했으니 천석은 할 수 있을게 아니냐 하며 이섬에 집을 지어 천석꾼이 되자고 몰려 갔다. 그러나 이섬은 몇번의 장마에 씻겨 내려가는 일도 있었으나 1972년의 큰 홍수로 아주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은 충주댐 건설로 지형조차 알 수 없다.

피난터

제천시 수산면 계란리에 계란재란 고개가 있다. 계란리에는 절경을 이루는 강선대(降仙臺)가 있다. 청간계류에 걸린 계란교변에 펼쳐져 있는 커다란 반석으로서 층층으로 되어있어 백사람이 앉을 만큼 크다. 계란리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피난터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사람이 백명쯤 올라설 수 있는 널다란 마당바위가 있고 거리에는 어떤 힘센 장수의 발자국이 움푹 패여 있다. 그리고 근처에는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들어 놓은 바위들이 흩어져 있다. 조선조에 들어서서 부터는 부쩍 왜구가 설치더니 급기야는 임진왜란이 터지고 말았다. 이때 피난민들은 계란리의 마당바위에 몰리게 되었다. 이때 장수가 나타나 말을 타고 적군과 싸우러 나가기전 바위를 거닐면서 여기에 발자국을 남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단기(單騎)로 싸우던 장수는 중과부적이여, 부상당한 몸으로 이곳까지 돌아와서는 목숨을 끊었는데, 한이 서린 장수는 바위로 변했다고 말한다. 장수가 타고 다니던 말도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다 또한 바위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기 둘을 업은 할머니가 장수의 전사 소식을 듣고 슬퍼한 나머지 벼랑에서 떨어져 죽으려 했는데 이 또한 돌로 변하고 말았다. 장수바위, 말바위 등이 지금도 장수의 한을 담은 채 서있다.

용마(龍馬) 무덤

제천시 고명동 백양 마을 나지막한 야산에 용마(龍馬) 무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수백년전 임진왜란을 20여 년 앞둔 선조때의 일이었다. 이 마을의 칠원 윤씨 집에서 청룡(靑龍), 황룡(黃龍)이 싸우는 두 마리 용을 한품에 끌어 안은 태몽을 꾸고 부인이 태기가 있더니 열 여덟 달만에 윤씨집 부인이 산기를 느끼게 되었다. 이때 방안에 상서로운 기운과 향기가 가득한데 한 선관(仙官)이 나타나 "나라의 기둥이 될 귀한 아들을 낳으려니 삼칠일을 이 방안에 사람을 금하라. 낳은 후 삼일이면 아기가 없어지리니 찾지도 말것이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 아기는 천년에 한사람 나는 장수가 되리라. 어미된 사람은 각별히 조심하고 내말을 명심하라" 이른 뒤 홀연히 선관은 간곳이 없고 아기를 분만하니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준수할 뿐만 아니라 우는 소리가 마치 용이 등천하는 듯 장엄했다. 산모가 출산후 삼일만에 변소에 다녀오니 아기가 없지 않는가. 선관이 일러준대로 찾지 말아야 할 아기를 엄마가 찾고 있으니 아기는 6척이 넘는 선반 위에 앉아 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엄마품에 안기어 삼일을 운 다음 그 어머니께 나라의 운수가 다했으니 내가 천수를 누리어 대장부의 큰 꿈은 펼 수가 있느냐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바로 손위인 누이는 마냥 아기를 시기하여 살의를 품고 엄마 눈을 피해서 동생인 아기를 죽이려고 방망이로 머리를 때리고 마루 끝에 밀쳐도 죽지 않고 슬기롭게 잘 자라기만 했다. 집안에 장수가 나면 집안이 망한다는 시기심에 변함이 없이 누이는 한마을 이웃집으로 출가했고 아기는 14살 되던 해에 서울 명문가로 장가를 들었다. 장가든지 한달이 지나 처조부 제사임을 아내로부터 들은 장수는 저녁을 먹고 의관을 바로하여 서울 처조부 제사에 참례하고 장모가 마련해주는 음식물을 싸 가지고 집에 와 식구들과 같이 야참을 먹어 또한번 집과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누이는 이 사실을 알고 시기심이 더욱 높아 밤마다 동생의 신방에 귀를 대고 동생의 내외가 주고 받는 말을 엿듣던 중 하루는 동생이 올케에게 은밀히 하는 말이 마을 우물에 내일밤 자정을 기해 청결하게 몸을 가꾸고 조 3말을 붓고 오라고 이르는 것이었다. "올케는 어인 일로 먹기도 어려운 조 서말을 우물에 붓습니까?" 하고 물은 즉 "천기를 누설할 수 없지만 장차 나라에 크게 유용하게 쓰이게 될지는 앞으로 6년 후면 알게 되리라"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누이는 밤을 새워 마을 우물을 퍼내니 조알이 모두 군사의 형체가 되어 있었으나 바깥 바람을 쐬자 죽정이가 되어 전부 날아가지 않는가? 그 이튿날 장수는 누이와 온 가족을 불러놓고 나라의 운이 다하고 내가 갈때가 되었으니 쌀 3가마니로 술을 빚고 술이 다 익거든 큰 소를 한 마리 잡으라고 일러 놓고 홀연히 집을 나갔다. 술이 익은 5일후 소를 잡고 기다리니 장수는 "하늘의 남성선관(南星仙官)께 수(壽)를 빌었으나 듣지 않으시니 할 수 없는 일이요" 땅이 꺼지듯 장탄식을 한 뒤 술을 동이채로 먹고 쇠다리를 한입에 훑으니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술과 쇠고리를 혼자 다 먹은후 "나는 칼로 쳐도 창으로 찔러도 죽지 않으나 내 양쪽 겨드랑이에 손바닥만한 용의 비늘이 있으니 이 비늘을 건드리면 죽을 것이다" 하고 유언을 했다. 그 누이가 겨드랑이를 쳐들어 보니 과연 용의 비늘이 붙어 있는 것을 손톱으로 건드리니 잠시 하늘에 빛이 없고 벼락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 다음 장수는 죽고 의림지 용터에서 용마가 나와 뱀골 마을을 7일을 밤낮으로 울고 치달리다 죽은 3년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하여 죽은 용마는 뱀골에 장사지내니 그 후부터 이 무덤을 용마무덤이라고 전한다. 이와 같은 전설은 제천시 모산리 덕현 마을의 말 무덤이 있다.

도둑바위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에서 계란리를 넘어가는 고개에는 도둑들에 얽힌 바위와 동굴이 있다. 도둑바위, 도둑굴 도둑발자욱들이 그것인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서서는 각처에서 왜구들의 행패가 자주 일어나더니 결국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왜군들은 이곳까지 쳐들어와 사람을 헤치고 노략질을 일삼아 사람들을 못살게 굴어 일시에 가산을 잃고 피난하는 사람이 많았다. 왜란이 끝난후 오갈데 없는 사람들이 도둑으로 변신하여 이곳에 은신하며 길가는 사람의 봇짐을 털어가곤 하여 괴곡에서 계란 사이를 넘나드는 사람은 혼자다니기를 꺼려했다. 그런데 먼길을 가던 할머니 한사람이 괴곡에 와서 계란쪽으로 넘어가려 했다.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가 혼자 가는 것은 위험하니 여러 사람이 갈 때 함께 가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급한 일이 있다며 혼자 고갯길에 올라갔다. 숨어 있던 도둑 한사람이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보따리를 뺏으려 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도리어 도둑에게 덤벼들더니 도둑을 두들겨패 도망치게 만들었다. 할머니의 힘도 도둑이 당해내지 못한 것이다. 걱정이된 동네 사람들이 뒤쫓아 왔을 땐 도둑은 물론 할머니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난 후였다. 이일이 있는 후부터는 그 고개에 도둑이 얼씬도 못하고 길가는 나그네들이 마음놓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산아래 마을 사람들은 도둑의 행패를 보다 못해 신선 할머니가 할머니로 변신하여 도둑들을 ?아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때 도둑들이 있던 바위가 도둑바위이며 도둑이 남긴 발자국을 도둑 발자국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도둑이 숨어 있던 굴이 도둑굴인 것이다.

독심정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 단종왕을 영월에 안치시켜 놓고 성삼문을 위시한 사육신을 악형으로 숨지게 했다. 뜻있는 많은 사람들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고 세월을 보내니 그중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직계학으로 당대에 문명을 날렸던 원호(元昊)는 원주 고향으로 돌아와 단종이 계시는 청량포와 가까운 곳을 찾아 동으로 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제천에 온 원호는 현의 동헌(東軒) 앞산 지금 제천시 교동 뒷산으로 시내에서 가장 높은 산인 이산이 청량포의 방향이라 불피풍우(不避風雨) 하고 매일 홀로 정상을 찾아 올라 청량포를 향해 망배하고 통곡했다고 한다. 그 뒤 사람들은 이 산을 독심정(獨尋頂)이라 불렀다.

아미산 약수굴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와 덕산면의 경계를 이루며 아미산이 서있다. 명산이라 일컬어 지는 아미산은 백미산, 아미산, 배모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소위 장군대좌형을 하고 있어 명당자리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아미산 동쪽 중턱에 굴이 뚫려 있고 그속에서 감열하고 청상한 약수가 용출하고 있다. 이물은 다시 흘러 폭포를 만드는데 명천선수로 이름이 나있어 이를 마시면 갖가지의 병은 물론 마음까지 깨끗해진다고 하여 옛부터 유명하다. 꽤 오래된 옛날, 삼복의 무더운 계절 산아래 사는 젊은 사람이 복을 누르기 위해 개를 잡아 개탕을 끓여 먹고 술도 얼큰하게 취하여 약수동굴에 오게 되었다. 염천과 술기운으로 갈증이 심해 약수를 마음껏 마셨다. 그런데 젊은이는 약수동굴을 나오자마자 동굴앞에 엎어져 죽고 말았다. 신성한 약수물을 개고기를 먹고 와서 부정하게 하였으므로 산신과 부처가 노하여 죽게 만들었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약수동굴 근처에서는 살생을 하지 않고 부정스러운 짓을 안하게 된 것이다.

넋고개

조선조 숙종때 제천 향교골에 대대로 내려오는 선비 집안에 정훈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훈은 연로하신 아버지가 우연하게 병을 얻어 병세가 심히 위독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훈은 백방으로 약을 구해 써봤으나 효험이 없고 병세는 점점 기울어졌다. 워낙 가난한 살림이라 약을 사다드릴 도리가 없고 그렇게 앓고 계신 아버지가 돌아가시도록 내벼려 둘 수도 없었다. 하루는 스님을 만나 선비 훈은 자기의 심정과 아버님의 병환이 위중하신데 무슨 약을 써야 하는지 알려만 주시면 목숨과 바꾸더라도 구해다 드리겠으니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간곡하게 말하니 스님은 그 효성에 감동하여 "가르쳐 드리겠습니다만 심히 어려운 일이요. 그것은 당신이 죽으니 그 약을 누가 아버님께 드리겠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선비 훈은 "약을 구하고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부모를 위한 일이니 후회는 하지 않지만 약을 갖다 드릴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요" 스님에게 약을 구해 아버님께 드린 후에 죽게 해 줄 수는 없느냐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한참 염주알을 굴리다 고개를 들고 "나무관세음보살을 30만 번을 외고 감악산 왼쪽 깊은골 큰 바위밑에 가면 천미라는 약이 있을 터이니 캐다 드리시오" 하였다. 이말을 들은 선비는 고마워 고개를 드니 스님은 간곳이 없지 않은가. 훈은 감악산 왼쪽 큰골 큰바위 밑을 찾아 밤에 '나무관세움보살'을 30만번을 외우며 찾아가니 과연 일러준 약이 있는데 약을 캐는 순간 훈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마가 되었을까 사자를 따라 염라대왕 앞에 선 훈을 보고 "너는 어이해서 만지면 안되는 약초에 손을 대었느냐 네 수명은 많이 남았지만 약초를 캔 죄로 너는 죽음을 달게 받으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닌가. 훈은 울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고 아버님께 약을 드린 후에 죽게 해 달라고 울부짖으며 애원했다. 옆에 섰던 사자가 염라대왕에게 "세상이 모르는 약초는 문수보살이 정훈의 효도에 감동되어 가르쳐 준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염라대왕은 한참 생각 끝에 "네 효성에 감동되어 너를 돌려보낸다. 그러나 네가 약을 다려서 아버지께 드리면 바로 병이 낳는다. 너는 그 자리에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인데 소원이 없느냐"하고 묻는 말에 그 자리에세 "제가 죽고 아버님 병환만 나으시면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그저 감지덕지할 뿐이옵니다." 하고 진심에서 고마움을 사례하니 염라대왕은 "과연 보기드문 효자로다 돌아가라. 너는 오늘 사시까지 아래고개에 닿지 않으면 주인없는 고혼이 되리라. 빨리 가라"하였다. 훈은 큰절로 사세한 뒤 약뿌리를 들고 단숨에 뛰어오니 아래 고개에 자기 상여가 쉬고 있지 않는가. 한번 죽었던 훈의 영혼이 육신으로 돌아가게 되어 소리치자 상여꾼이 얼른 시신을 끌렀다. 죽었던 훈은 벌떡 일어나 약초를 들고 달려가 아버지께 약초를 다려드려 병을 낳게 되었다. 이후부터 아래 고개를 넋고개라 부르고 훈은 80세까지 살았다 한다. 이 넋고개는 지금 제천시 변두리로 제천중학교에서 하소리로 가는 나지막한 비탈길로 사람의 왕래가 많은 큰길이다.

용이 못된 지네

1907년 때의 일이다. 이무렵 청풍에는 김장군이란 의병장이 머물고 있었다. 왜병들과의 싸움이 없던 어느날 김장군은 칼을 짚고 앉아 잠깐 조는 사이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이 나타나더니 김장군에게 간절히 청을 드리는 것이었다. "나는 강물 속에서 몇백년을 살아온 이심인데 이제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건너편 바위속에 천년묵은 지네가 먼저 용이되어 승천하려고 괴롭히고 있으니 도와주십시오." 오찌 인간인 자기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겠느냐 되물었더니 꿈속의 노인은 "오늘밤 자정에 한벽루에서 큰 잔치를 열어 지네를 청할테니 지네가 와서 잔치자리 앞에 마련한 제단위에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단칼에 내려쳐 주시오."하는 것이었다. 밤이 깊어 의병들이 잠든 사이에 김장군은 의병막사를 빠져나와 강변에 어스름히 서있는 한벽루로 다가갔다. 꿈에 본 백발노인이 어스름한 달빛아래 온갖 기름진 음식과 술을 차려놓고 지네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풍악소리는 요란하지만 풍악쟁이는 보이지 않았다. 음식상앞 제단에는 커다란 칼이 놓여 있었다. 김장군은 제단의 칼을 들어 휘들러보고는 한벽루 아래 한구석에 숨었다. 쏴쏴하는 소리가 나더니 스무자는 족히 되는 긴 몸둥이를 지난 지네가 꿈틀거리며 한벽루에 오르는 것이다. 벼락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불빛도 잔치자리도 사라졌으며 김장군도 그 자리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침이 되어 김장군은 동네 사람들과 부하들이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정신을 되찾았다. 까닭을 묻는 사람들에게 김장군은 손가락으로 강건너 암벽을 가리켰다. 암벽에 뚫린 굴에는 꼬리부분만이 밖으로 나온 지네가 보였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지네 지네" 하는 놀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음날 밤 꿈속에 백발 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하는 말이 "장군의 덕으로 저는 용이되어 하늘로 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군께서는 지네를 죽이지 못하고 상하게만 했으니 지네란 놈이 앙심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 각별히 몸조심하라고 이른후 백발노인은 홀연히 사라졌다. 김장군은 얼마후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고 말았다. 김장군이 숨을 거둘 무렵 한벽루에서 있었던 이심과 지네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후 한벽루 건너편 암벽에 뚫린 바위를 지네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지금도 지네굴에서 지네가 나온 일이 있는데 그때 대홍수가 나서 한벽루가 무너진 일이 있었다. 지금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고 말았다.

가창산(歌唱山)

연산군 하면 폭군으로 이름이 나있다. 연산군은 선비를 죄없이 살해 또는 귀양보냈다. 선비들은 당쟁으로 많은 파벌로 갈라지고 간신배들은 연산군의 독재을 부채질하는 바람에 뜻있는 선비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버렸다. 갑자사화로 부모를 잃은 서울의 어느 명문집 두 아들이 양평, 용문산으로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났다. 용문산에서 열심히 공부에 몰두한 두 젊은이는 10년이 넘어 두 젊은이의 나이가 20을 바라보는 어느 3월3일 삼짇날 스승은 더 가르칠 것이 없으니 이곳을 떠나라고 했고 두 젊은이는 속세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절대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자로써 후진을 가르치기만 하자고 맹세했다. 당시 사회가 두려워 벼슬을 단념하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가 많았던 때였다. 두 친구는 헤어져 자기 갈길을 찾아 나섰다. 얼마의 세월이 흐른뒤 한 친구는 대장부로써 한 번 벼슬길에 나아가 자기의 높은 포부와 경륜을 펴보고 싶었다. 때마침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등극하고 알성시가 있자 이에 장원급제하여 차차 벼슬이 올라 안락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는 동안 문득 우정을 배신한 자신을 깨닫고 옛 친구를 찾아 사과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각지의 수령방백에게 친구를 찾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얼마쯤지나 제천현에 산다는 강원감사로부터 소식이 있었다. 그는 즉시 조정으로부터 말을 얻어 관복을 벗고 도포차림으로 친구를 찾아나섰다. 마침내 제천현에서 30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산에 오르게 됐을 때 멀리 통나무집 한 채가 나무사이로 보였다.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고 있는 친구의 집이었다. 낭랑한 글읽는 소리가 집안에서 흘러나왔다. 몇번인가 "이리오너라"하고 친구를 불렀다. 친구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얼싸안아 주었다. 두 사람은 눈물만 흘리고 말을 잊었다. 방에 들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고 친구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친구는 생각보다는 너그럽게 자기의 한 일이 잘했다고 용서해 주었다. 그리고 이도(吏道)에 관해서 간직했던 경륜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단간방이니 어쩌랴 친구의 부인은 치마로 방의 반을 막았다. 저녁은 꽁보리밥에 감자를 섞어 산채로 만들어 가져왔다. 맛있게 먹고 정담을 나누며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하며 무릎을 치고 서로 칭찬하는 남편과 친구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우정속에 친구의 아내도 점차 빠져들어갔다. 아내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친구의 아내는 가만히 가야금을 벽에서 내려 무릎위에 얹어놓고 두 사람의 정담에 맞춰 성심을 다해 가야금을 뜯었다. 높고 낮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음률에 남편의 친구도 넋을 잃었고 밤을 애던 풀벌레도 하늘의 별도 달도 그리고 온 세상이 잠들고 가야금의 음률에 넋이 빠졌다. 이렇듯 한 여인의 간절한 지성으로 친구를 즐겁게 했다고 하여 뒷 사람들은

아들바위, 딸바위

제천에서 북진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남한강을 건너 또다시 충주쪽으로 가다 보면 제천시 청풍면 계산리에 이른다. 옛날 박첨지 내외가 지금의 계산리인 계장골에 살고 있었다. 박첨지 내외에게는 어린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박첨지 부인은 절에 불공을 드려 아들을 점지해줄 것을 빌었다. 어느 때는 백일치성도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박첨지 부인이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길옆 숲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가보았더니 커다란 알 두 개가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알 두 개를 집으로 가져다 따뜻한 방안에 놓아 두었다. 그런지 며칠만에 알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온 것이다. 하나는 사내, 또하나는 계집아이였다. 박첨지는 크게 놀랐으나 이것은 필시 부처님의 점지해준 자식으로 알고 무척 기뻐하였다. 정성을 들여 키웠다. 남자아이는 오빠가 되고 여자애는 누이동생이 되었다. 점점 자라자 오누이의 사이를 벗어나 이성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몹시 괴로워 하던 누이는 흰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밤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런 후 누이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누이를 찾아 집을 나선 오빠도 돌아오지 않았다. 두사람을 이미 숨져 있었다. 그런데 홀연히 두 사람이 없어지더니 그 자리에는 두 개의 바위가 솟아 나왔다. 그후 동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아들바위 딸바위라 불렀다.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강강당(姜講堂)

제천시에서 어상천 방향으로 10리쯤 가면 검은돌(玄岩)이라고 하는 곳에 이른다. 이곳은 두학리에 속해 있는데 4백년전 이곳에 살던 진주강씨가 길가에 있는 바위에 현암(玄岩)이라 각자(刻字)를 해 놓은 곳이다. 이 곳에 퇴락한 고가가 한채 있었는데 서당의 건물이다. 4백년 전에 강씨들이 자제들을 중심으로 한 서당이다. 강강당 또는 강당이라 불렀다. 조선조 초기를 지나 중기에 접어들 무렵 강씨 집안에 총명한 도령이 있었다. 8세때 논어는 물론 사서삼경을 논하게 됐다고 한다. 이 강도령이 열두살 되던 해 어느날 여느때처럼 동료 학동들과 더불어 서당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밖이 왁자지껄하면서 떠들썩하더니 나팔소리까지 나는 것이다. 함께 공부하던 아이들은 모두 무슨 일인가 해서 밖으로 뛰쳐나갔으나 강도령만은 자리를 뜨지 않고 글읽기를 계속하였다. 밖에는 충청감사의 행차하는 행렬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것을 구경하려고 동네의 남녀노소가 모두 거리에 뛰쳐나와 떠들썩하였다. 감사의 행렬이 서당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행렬에 아랑곳 없는 듯 누군가의 글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행렬을 멈추게 한 감사는 별배를 시켜 글읽는 사람을 데려오도록했다. 별배와 더불어 나온 강도령에게 감사는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길에 나와 있는데 너만은 혼자 글을 읽고 있는 까닭이 무엇이냐?" 강도령의 대답은 간단했다. "학문은 촌음을 아껴 정진해야 하는데 감사의 행렬이 있다 하여 밖에 나와 시간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감사는 후한 상을 내렸다. 강도령은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여 약관에 등과했다는 것이다. 강강당은 이러한 연유를 가진 옛 서당인 것이다.

효녀와 선심골

제천시 청풍면 연론리 뒷산에 선심골이란 골짜기가 있다. 험준한 산골짜기라 나무가 울창하고 깨끗하고 시리도록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다. 이 계곡에는 선심이라는 효녀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선심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조선조 중엽에 골짜기에는 어린 선심이와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오랜 병환으로 자리에 누워 있어 집안 일은 선심이가 도맡아 했다. 집근처의 조그만 밭을 일구어 곡식을 심어 양식으로 했다. 선심은 밭일이 끝나면 으레 산으로 올라가 약초를 캐곤했다. 선심은 날마다 약초 캐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약초를 다려 드려 병을 낫게 하려는 효심에서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환은 쉽사리 낫지 않고 점점 더해가기만 했다. 어머니가 병석에 누운지 삼년이 되었다. 이제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것같아 선심은 안절부절하였다. 병은 점점 더 심해져 갔다. 선심은 더 좋은 약초를 캐기 위해 밭일도 버려두고 산에서만 살았다. 끼니를 굶으면서까지 약초를 찾아 이산 저산 헤맸다. 동네 사람들은 선심을 불쌍히 여겨 양식을 조금씩 보태주어 끼니를 잇게 했다. 어느날 선심은 다른 산으로 가서 약초를 찾아보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샅샅이 산속을 뒤지다시피 했지만 약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커먼 구름이 물려오더니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금새 소나기가 쏟아질 것만 같은 날씨로 변했다. 비를 맞으면 큰일이다 생각한 선심은 어느 커다란 바위 밑을 찾아 피곤한 몸을 쉬기로 했다. 어느 틈에 선심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환해지더니 백발의 노인이 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 선심에게 어서 일어나 발밑을 보라는 것이었다. 깜짝놀란 선심은 벌떡 일어났다. 선심은 잠깐 동안에 꿈을 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늘에서 시커멓게 몰려왔던 구름이 없어지고 저녁 햇살이 숲속을 훤하게 비추고 있었다. 선심은 꿈에 들은 노인의 말이 생각나 발밑을 살펴보니 지금껏 보지 못한 풀 한포기가 돌틈에 삐죽 나와 있었다. 기이한 생각이든 선심은 조심조심 뿌리가 상하지 않게 캐냈다. 몇백년 묵은 산삼을 캔 것이다. 집에 돌아온 선심은 정성껏 다려 드렸더니 어머니의 병환은 씻은 듯이 나았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너도 나도 산으로 몰려갔지만 산삼은 캐지 못하였다. 효심이 지극한 선심만이 산삼을 볼 수 있도록 산신령이 도와준 것임을 알았다. 그 후부터 선심이 살던 골짜기를 선심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어씨 오장사(魚氏 五壯士)

조선조 선조때의 이야기다. 제천에 어씨 다섯 형제가 있었다. 맏형이 어득황(魚得滉)을 비롯한 형제등은 모두 힘이 장사여서 사람들은 어씨 오장사라 불렀다. 하루는 오형제가 의림지에 있는 대송정에서 놀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려고 했으나 불이 없어 피우지를 못했다. 그런데 의림지 건너 산기슭에서 나무꾼이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맏형인 득황은 담뱃대에 담배를 담더니 그것을 상투의 머리에 꽂고 의림지에 뛰어들어 헤엄쳐 건너가 나무꾼에게 불을 얻어 담뱃대에 불을 붙여 다시 머리를 꽂고는 뒤돌아 헤엄쳐오는 것이었다. 의림지에는 큰 이무기(이심)가 있어 가끔 나와서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는 일이 있었는데 득황이 의림지 중간쯤 왔을 때 물속에서 커다란 이무기가 솟아오르더니 그를 쫓아 오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있던 네 동생이 나무가지를 꺽어들고 물가에서 크게 소리치면서 형이 무사히 헤엄쳐 오기만 기다렸다. 맏형 득황은 쫓고 쫓기면서 물가에 올라오게 되었다. 화가 난 이무기는 물가까지 쫓아 올라와 크고 단단한 꼬리를 휘둘러 득황을 후려쳤는데 득황이 얼른 피하여 맞지를 않아고 단단한 꼬리는 옆에 있던 큰 나무에 박히고 말았다. 득황은 잽싸게 달려들어 주먹과 발길로 이무기를 쳤으며 나머지 동생들은 나무막대로 때려 죽여버렸다. 이무기의 비늘이 부서져 사방에 흩어졌고 흐르는 피는 의림지 물을 붉게 물들였다. 죽은 이무기를 들어 커다란 나무의 윗가지에 걸었더니 머리는 꼭대기에 있고 꼬리가 땅에 닿았을 정도로 큰 구렁이었다. 어씨 오형제가 이무기를 잡은 다음부터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놀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김이만(金履萬)의 어장사 참사가(魚壯士斬蛇歌)가 전해지고 있다.

돈넘이

제천시 금성면 월굴리 뒷산에는 돈넘이라는 구덩이가 있다. 옛날 월굴리에 돈많은 부자가 있었다. 얼마나 돈이 많았던지 어떻게 어느 곳에 돈을 써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서 월굴리 뒷산에 집을 짓고 옮겨가 멀리 흐르는 남한강 물을 끌어다 마시기로 했다. 물은 산위로 끄는데 일을 시켜 돈은 쓰고 신선처럼 살아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곳에 집을 지은지 얼마 안돼 집옆에 있던 구덩이에서 샘물이 솟아 나왔다. 결국 한강물을 끌어다 먹는 것은 사람들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아 그만 두었다. 그런데 부자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은 얼마 떨어지지 않는 절의 젊은 중과 눈이 맞아 몰래 만나곤 하였다. 딸은 집안에 있는 돈을 아버지 몰래 중에게 주었는데 어느날 이런 딸의 행실을 알아차린 부자는 화가나서 딸을 쫓아 나왔다. 구덩이 가를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가 부녀사이에 벌어졌다. 그 때 부자는 나막신을 신고 있었는데 구덩이 가의 바위에 나막신 자국을 남겼다. 사람들은 돈이 구덩이 너머로 넘어갔다 해서 이 물이 나오던 구덩이를 돈넘이 구덩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구덩이가에는 나막신 자국이 남아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학다리

제천시 교동은 향교가 있는 마을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향교골이라고도 하였는데 여기에 학다리가 있다. 학다리에 대해 제천 구읍지(舊邑誌)에 "鶴橋在懸東一里舊板土"라 한 것을 보면 학다리는 조선조 말기 훨씬 전에 놓여진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처음에는 나무로 된 다리를 나중에 돌로 다시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천에 향교가 세워지고 얼마 안될 무렵이다. 향교골 남쪽에는 칠성봉중에 하나인 독송정(獨松亭) 또는 독순정이라 부르는 산이 있는데 이 산은 나무도 그리 많지 않아 명절을 비롯해 나들이 하기 좋은 날씨일 때는 향교골 부녀자들이 많이 나와 놀았다. 그런데 향교골 어느 부자집 딸이 앓다가 죽었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로 죽은 딸이 불쌍해서 늘 딸이 가서 놀던 독송정 산에다 묻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칠성봉은 시체를 매장하면 안되는 곳이었다. 만일 이런 금기를 어기고 밀매장을 하면 독송정 산신이 노하여 마을에 재앙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밀매장한 것을 발견하면 묘를 파헤쳐 쇄시(碎屍)하여 왔던 것이다. 딸의 시체를 독송정에 묻어주고 싶었지만 쇄시(碎屍)되는 것이 걱정이 된 아버지는 한 꾀를 생각해 냈다. 딸의 아버지는 관 열 개를 짜게 하고 그 하나에 딸의 시체를 넣고 나머지 아홉 개의 빈관과 함께 어두운 밤에 몰래 독송정산 여기저기에 묻었다. 혹시 사람들에게 들킨다 해도 관 열 개를 동네 사람들이 모두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운이 좋아 빈관만 나오기만 하면 자기 딸의 시체는 그대로 독송정에 묻혀 있게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미를 알아차린 동네 사람들이 산을 샅샅이 뒤쳐 관을 파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관을 찾아내기는 했으나 모두 빈관만 찾아낸 것이다. 사람들은 다시 산을 이잡듯이 뒤진 끝에 열번째의 관을 찾아냈다. 사람들이 관뚜껑을 열었더니 별안간 관속에서 푸드득 소리와 함께 학 두 마리가 날개를 치더니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었으며 관속에는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관속에 나와 날아가던 학은 얼마 있다 한 마리는 학다리에 떨어져 죽고 남은 한 마리는 좀

거북바위(금성면)

제천시 금성면 진리에는 거북모양의 바위가 있지만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진리에 동네가 생겨날 때 부터 동네 한복판에는 거북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가 있었다. 진리 사람들은 이 바위가 동네를 지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 바위를 극진히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진리에 인접해 있는 월림리에서는 진리에 비해 이상하게도 동네가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자주 일어나고 진리보다 사는 형편이 어려웠다. 월림리 사람들은 이렇게 동네 형편이 좋지 못한 것은 진리에 있는 거북바위가 머리를 월림리 쪽을 향해 있기 때문에 거북의 눈이 늘 월림리를 노려보고 있어 동네의 형세가 자꾸만 오므라드는 것이라 여겼다. 지금으로부터 600~700백년전 쯤 되는 어느해 월림리 사람들은 몰래 진리에 들어와 거북바위의 머리를 부셔 버렸다. 그런 후에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게 되었으며 반대로 월림리는 점차 부자 마을로 변해갔다는 것이다.

여우고개

제천시 화산동에서 동현동으로 가는 고개를 여우고개라고 한다. 옛날에는 이 고개에 여우가 많아 오래 묵은 것은 곧잘 둔갑을 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밤늦게 지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이 있었다 한다. 여우고개가 나무 숲으로 우거져 있던 옛날에 있었던 일이다. 이 근처에 최진사가 살고 있었다. 최진사에게는 큰 아들이 있어 며느리를 보았다. 신랑, 신부가 혼례를 다 마치고 신부가 시집에서 첫날밤을 지낸 그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계집 종이 신혼부부가 일어나 시부모에게 문안드리러 나올 것을 기다리고 오래도록 아무 기척이 없는 것이 이상해서 밖에서 불러보았으나 아무 대꾸가 없었다. 더욱 수상하게 여긴 종은 크게 꾸중을 들을 셈치고 문을 열었다. 그랬더니 신랑은 그대로 자고 있는데 후닥닥 이불을 제치고 똑같이 생긴 신부 두사람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까무라치게 놀란 종은 급히 안으로 달려가 이 괴이한 사실을 어른께 고하였다. 역시 놀란 시부모도 똑같이 생긴 며느리 둘을 앞에 놓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는 말투며 움직이는 몸놀림이 똑같을뿐더러 입을 열면 같이 입을 열고 손을 놀리면 같이 손을 놀려 몸은 둘이지만 하는 짓은 한 사람이 하는 것과 같았다. 시부모들은 더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급히 신부의 친정에 사람을 보내 신부의 몸 어느 곳인가 다른 사람과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이 무엇인가 물어보기로 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신부 방에 들어가 두 사람의 가슴을 헤쳐 보았더니 두 사람 모두 빨간 점이 있어 이것으로도 어느 편이 정말 며느리인지 알아내지 못하였다. 이 소문이 밖으로 흘러나가 동네 아낙네들이 구경거리나 생긴양 몰려들었다. 그런데 모여든 부인네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것은 필시 여우의 장난이니 늙은 고양이를 방에 넣어보라는 것이었다. 시어머니는 급히 늙은 고양이를 구해다 신부가 있는 방에 넣고 얼른 문을 닫았다. 그랬더니 금새 방에서는 비명소리가 나더니 하얀 여우 한 마리가 꼬리를 말고 밖으로 도망쳐 나오더니 캥캥 울음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여우고개에 살고 있던 백년묵은 여우가 사람이 되고 싶어 새색시로 모습을 바꿔 의젓이 신부 행세를 하다 끝내 고양이에게 쫓겨 갔는데 고양이는 여우의 꼬리를 알아보고 덤벼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사람들은 더욱 밤에 여우고개를 지나기를 꺼려했으나 이 근처에 기차 철로가 놓이게 되고 기차가 요란하게 지나게 된 후로는 여우가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고승(高僧)의 천리안(千里眼)

제천시 금성면 월굴리의 금성천과 중전천이 합류하는 곳에 놓여진 다리를 높은다리(高橋)라 부른다. 그래서 높은 다리가 있는 마을 이름도 높은 다리로만 부르고 있다. 지금은 충주댐으로 인하여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이 다리는 조선조 중엽에 큰 돌을 괴어서 높이 쌓아 올린 것인데 그 뒤 큰 장마가 져서 떠내려가는 바람에 60년전에 새로 놓은 것이다. 한 삼백년은 실히 ?을 아주 옛날 일이다. 금성천과 중전천이 마주치는 곳에 마을사람들이 힘을 모아 다리를 놓기도 했다. 온 동네 남녀노소가 모두 나와 흙을 파고 돌을 나르는 큰 역사(役事) 끝에 추석을 며칠 앞두고 다리를 완성했다. 동네 사람들은 기뻐서 잔치를 벌였다. 먹고 마시고 춤추며 풍악을 울리는 흥겨운 잔치가 무르익을 무렵 한 도승(道僧)이 이곳을 지나다 다리를 보고 "이 다리는 높은 다리라야 해야 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하도 이상하여 그 까닭을 물었다. "이 마을은 앞으로 부자가 계속 나오는 길지(吉地)이지만 삼백년 후면 바닷물이 난간까지 들어올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 이름을 미리 높은다리라 불러야 합니다." 이 말을 마친 도승은 홀연히 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도승의 예언은 신기하게도 들어맞아 3백년이 지난 지금 물에 잠기고 말았다.

서울고개

조선조의 다섯 번째 임금인 문종은 재위 2년만에 어린 세자를 남겨 놓고 승하하였다. 이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단종이었다. 그러나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왕위를 찬탈하여 임금의 자리에 올랐고 단종을 강원도 영월로 귀양보냈다. 단종은 양평, 원주, 제천을 거쳐 영월로 가는 도중 지금 제천시 남천동에서 동현동으로 가는 고개에서 쉬게 되었다. 단종은 울창하고 향기로운 봄을 맞으며 이 아름다운 고개마루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한다. 이때 단종께서 수행원들에게 말씀하기를 "내 어찌 이 고개를 넘어 귀양을 가는 것이 서운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주민들은 이 고개를 '서운고개'라 불러오다가 근래에 와서는 '서울고개'라 불러지고 있다.

구슬을 삼킨 지리박사(地理博士)

제천시 금성면 동막리는 맨 먼저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룬 곳이 텃골이다. 텃골에 마을이 생겨날 무렵 전주이씨가 이곳에 살고 있었다. 이씨는 어릴 때 텃골 고개를 넘어 글방에 다녔다. 날마다 나무만 빽빽히 우거졌을 뿐 인가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쓸쓸한 고갯길을 넘어다녔다. 그날도 언제나처럼 어린 이씨는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길 한옆에 우뚝 서있는 것이었다. 신기한 일이다. 어린 이씨는 그집 앞을 주춤주춤 지나치려 할 때 대문이 열리더니 아리따운 여인이 안에서 나왔다. 여인은 어린 이씨에게 들어오기를 청했다. 이씨는 어떤 힘에 끌리기라도 하듯 여인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어린 이씨를 방으로 안내하더니 다시 나가 버렸다. 그가 안내된 방은 생전 처음보는 것들로 장식돼 있었다. 휘황찬란하게 장식된 방안에서 어린 이씨는 우두커니 앉아 여인이 오기만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여인은 나타나질 않았다. 그는 기다리다 지쳐 그만 꾸뻑꾸뻑 졸기 시작했다. 후딱 정신이 든 어린 이씨는 무서운 생각에 급히 글방으로 달려갔다. 글방 훈장은 어린 이씨에게 늦은 까닭을 물었다. 어린 이씨는 차근차근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고했다. 이것을 다 듣고 난 훈장은 어린 이씨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그 여인은 언젠가 또 나타나 그때는 같이 살자고 할 것이니 그러면 너는 그 여인의 입에 있는 구슬을 달라고 해라" 과연 며칠 후 어린 이씨가 텃골고개를 넘으려는데 기와집과 그 여인이 다시 나타났다. 그 여인은 훈장의 말대로 어린 이씨에게 같이 살자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어린 이씨는 훈장의 말대로 입속에 있는 구슬을 달라고 했다 여인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어린 이씨에게 다가와 입을 맞추더니 입속에 든 구슬을 어린 이씨의 입속에 넣어 주더니 어린 이씨의 뺨을 후려 갈기는 것이었다. 호되게 뺨을 얻어 맞는 어린 이씨는 그만 앞으로 넘어져 까무라치고 말았다. 잠시후 정신을 되찾은 그는 기와집도 여인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것을알았다. 글방에 돌아온 어린 이씨는 훈장에게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말씀드렸다. 이 이야기를 훈장은 기뻐 어쩔줄 모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빠졌으면 천기박사(天機博士)가 될 텐데, 엎어졌으니 지리학박사가 되겠군." 어린 이씨는 자라면서 박달재에 앉아서도 경상도 부산포까지의 지리를 훤히 내다 볼 수 있는 기인이 되었다. 텃골 고개에 나타난 여인은 이 근처 깊은 산골에 살던 백년 묵은 여우가 사람의 모습으로 둔갑을 하여 이씨 앞에 나타난 것이며 입속에 있던 구슬을 이씨에게 건네 입안에 물게하여 이씨를 더욱 혹하게 하려던 것이다. 그러나 구슬을 이씨가 삼켜 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난 것인데 그 구슬의 효능으로 이씨는 앞을 내다보는 신통력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것을 미리 알고 있던 글방 훈장은 이씨를 위해 그렇게 시킨 것은 물론이다. 앞을 훤히 내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씨는 남이 명당 묘자리를 보아 달라 하면 자기 자손의 앞날과 비교해서 그것보다 더 못한 터를 잡아 주곤 했다. 세월이 흘러 이씨가 노년이 이르러 죽음이 가까워 왔음을 알고는 두 아들을 앞에 불러 이렇게 일렀다. "내가 죽은 다음에 내가 묻힐 명당을 두 군데 잡아 놓았는데 그 가운데 한 군데에 나의 묘를 쓰면 너희들에게 복이 올 것이다" 이어서 형제에게 다시 이르기를 "그 한 군데는 지실 골짜기인데 엄동설한에도 닥나무에 꽃이 피는 곳이며 다른 한 곳은 막대골(莫大洞)에 노루가 죽어 있는 곳이다. 두 아들이 따로 한 곳씩을 찾되 먼저 찾는 곳을 묘를 쓸 것이며 반드시 쇠갓을 쓴 사람이 묘앞을 지날 때 하관하라고 일러 주었다. 또 한가지 만일 안산(案山) : (집터나 묘자리의 맞은 편에 있는 산)에 산사태가 나는 일이 있으면 이동네를 떠나야 한다. 이렇게 자신의 묘자리를 아들 형제에게 일러준 지 얼마후 이씨는 운명(殞命)하게 되었다. 두 아들은 각각 이씨가 일러준 명당을 찾아 나섰다. 큰 아들은 지실 골짜기를 샅샅이 뒤졌으나 닥나무가 있는 곳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 아들은 막대골에 들어가 노루가 죽은 곳을 찾아냈다. 막대골 광(壙)을 파고 쇠갓을 쓰고 지나는 사람을 기다렸으나 나타나질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큰 아들은 그대로 하관 하자고 하고 작은 아들은 좀 더 기다리자고 우기다 결국 큰 아들 성화에 못이겨 하관을 하고 봉분을 거의 다 만들어 가는데 산 위에서 어떤 여자가 쇠로 된 솥뚜껑을 머리에 이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씨가 쇠갓을 쓴 사람이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말이었다. 상주들은 하관의 시를 어겼음을 알았으나 이미 하관을 한뒤라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지 십년이 지났다. 십년되던 해 묘소의 안산에 산사태가 일어났다. 이씨의 유언에 따라 이씨의 아들형제는 막대골의 노루가 죽은 자리를 찾아 묘를 쓸수 있었으나 장례 때에 하관시를 어겼기 때문에 이씨 가문에 큰 인물이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수탑(長壽塔)

옛날 장락리에 아주 나이가 많은 스님이 시주를 왔다. 어떤 집 주인이 심술궂어서 곡식 대신 모래를 퍼 주었다. 옆에서 이것을 보고 있던 젊은 며느리가 다른 곳으로 가는 스님을 쫓아가서 쌀을 주고 시아버지의 무례를 용서할 것을 빌었다. 노승은 며느리에게 얼른 이 자리를 피하라고만 이르고 홀연히 가버렸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며느리는 우두커니 서 있는데 별안간 천지를 뒤 흔드는 커다란 소리가 나더니 심술궂은 사람의 집은 탑으로 변하고 며느리는 돌로 변하였다. 노승이 착한 며느리에게 피할 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미쳐 피하지 못한 것이었다. 장수탑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그런데 탑 옆에는 큰 못이 생기게 되었고 못 속에 붕어가 두 마리 살게 되었다. 이 근처에서 나이 어린 두 형제가 날마다 이 곳에와 붕어들과 놀았다. 그런데 이것이 샘이 난 형은 동생에게 붕어를 잡아오라고 하였다. 동생은 싫다고 하다 마지못해 붕어에게 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붕어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동생은 물속에 끌려 들어가 죽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 후에 두 마리던 붕어가 세 마리가 되어 다시 나타나 물 속을 헤엄쳐 다니며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형은 이것을 잡아 먹었다. 그랬더니 형 또한 죽고 말았다. 이때 형이 살던 집쪽으로 장수탑이 기울어졌다. 이것이 장수탑이 기울 게 된 까닭이다.

옥녀봉(玉女峰)

제천시 강제동과 금성면 동막리에 걸쳐 있는 옥녀봉은 그 주봉의 꼭대기가 바위로 되어 있고 거기에 서 있는 소나무가 마치 옥녀가 머리를 풀고 있는 형상이라 옥녀봉이라 불리운다.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아 심한 가뭄이 들면 이 옥녀봉을 찾아와 꼭대기 바위 위에 뚫어진 작은 구멍에 약손가락을 넣고 비오기를 빈다. 그 구멍은 옥녀가 끼고 있던 반지가 들어 있는 구멍이라 전해오기 때문이다. 또한 옥녀봉 바로 아래는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할만큼 맑고 깨끗한 물이 가득했던 연못이 있다는 말이 전해지지만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이 옥녀봉에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많은 전설이 있다. 선녀들이 하늘과 땅 사이를 마음대로 오갈 수 있었던 아주 아득한 옛날의 일이었다. 옥녀봉 아래 동네에는 한 젊은 총각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면서 천둥번개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옥녀봉 산 아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총각은 어쩔줄 몰라 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다. 그러나 하늘은 총각을 놀리기라도 하듯 금새 동쪽 옥녀봉 기슭 하늘에는 아름다운 옥색 무지개가 걸쳐지더니 하얀 용마 한필이 끌고 무지개를 타고 내려 오는 것이 보였다. 총각은 꼭 무엇에 홀린 것 같았다. 총각은 단숨에 옥녀봉 중턱까지 치달아 올랐다. 정상까지 웬만큼 남았을까, 용마가 보이고 그 너머엔 옥같이 맑은 물이 고인 연못이 보였다. 젊은이는 그 순간 숨이 막히는 듯했다. 연못에서는 삼단같은 머리를 늘어뜨린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 총각은 얼른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지켜보았다. 이윽고 목욕이 다 끝난 여인은 용마를 불러 수레에 탔다. 거짓말처럼 하늘이 다시 컴컴해지더니 번개와 천둥이 치며 소나기가 쏟아졌다. 이 일들을 소상히 어머니께 이야기 했다. 그 소리를 듣던 늙은 어머니는 탄식을 했다. "얘야, 네가 못볼 것을 보았구나. 이제 큰 걱정이구나. 네가 본 여인은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玉皇上帝)를 모시는 선녀란다. 선녀는 가끔 지상에 내려와 맑은 물로 목욕을 한다. 그러나 만일 그 목욕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서 큰 벌을 받는다더구나" 젊은이는 한편으로 두려운 마음이 일어났으나 한편으로는 옥같이 아름다운 선녀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젊은이는 아름다운 선녀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아름다운 옥녀가 다시 나타나 자기를 보고 싶으면 그 연못으로 찾아오라는 것이다. 이튿날 젊은이는 옥녀봉 연못을 찾아갔지만, 선녀는 내내 내려오지 않았다. 이미 옥녀에게 넋을 ?은 젊은이는 언제가는 내려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날이면 날마다 그 연못을 찾아갔다. 그러나 옥녀는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젊은이는 못가에서 치성을 드리기로 했다. 어느날 젊은이는 그 날도 못가에서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천지를 뒤흔드는 것같은 요란한 천둥이 일어났다. 젊은이는 번개와 천둥소리에 그만 까무라치고 말았다. 젊은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연못에서는 옥녀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 기뻐 어쩔줄을 모르는 젊은이 앞에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은 옥녀가 다가왔다. "옥황상제께서 당신을 데리고 오라하십니다" 옥녀는 손을 내밀어 젊은이의 손을 덥석잡았다. 옥녀의 부드러운 손에 잡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젊은이의 손에는 옥녀가 끼고 있는 반지가 쥐어졌다. 다시 하늘이 캄캄해지고 번개와 천둥, 그리고 소나기가 내린다음 무지개가 연못에 와 박혔다. 젊은이는 옥녀의 손을 잡고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때 젊은이의 손에서 옥녀의 반지가 아래로 떨어졌다. 반지는 옥녀봉 꼭대기의 바위에 가서 박히면서 손가락만한 구멍이 뚫렸다. 하늘로 오른 젊은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옥녀봉 꼭대기의 바위에 난 구멍에 손가락을 넣으면 옥황상제가 노하여 비를 내린다는 것이며 옥녀봉은 목욕하느라 머리를 풀어 내린 선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전한다.

의림지

제천시에 북쪽으로 약 10리를 가면 관광지로 유명한 의림지가 나타난다. 옛날 의림지가 생기기 전에 이곳에 부자집이 있었다. 하루는 이집에 스님이 찾아와 시주할 것을 청하였다. 그런데 이집 주인은 탐욕스러울 뿐만 아니라 심술 또한 사나왔다. 한동안 아무 대꾸도 없으면 스님이 가버리려니 했는데 탁발스님은 가지않고 목탁만 두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심술이난 집주인은 거름 두엄에 가서 거름을 한 삽 퍼다가 스님에게 주었다. 스님은 그것을 바랑에 받아 넣고 선 머리를 한 번 조아리더니 발길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집안에서 보고 있던 며느리는 얼른 쌀독에 가서 쌀을 한바가지 퍼다가 스님을 뒤쫓아가 스님에게 주며 시아버지의 잘못을 빌었다. 스님은 그것을 받더니 며느리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조금 있으면 천둥과 비바람이 칠터이니 그러면 빨리 산속으로 피하되 절대로 뒤돌아 보면 안된다고 하였다. 이 소리를 듣고 며느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집안에서는 집주인이 하인을 불러 놓고 쌀독의 쌀이 축이 났으니 누구의 소행인지 대라고 호통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자기가 스님이 하도 딱해 퍼다 주었다고 아뢰었다. 시아버지는 크게 노하여 며느리를 뒷방에 가두더니 문에 자물쇠를 채워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해 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번개와 천둥이 울리고 세찬 바람과 함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광속에서 안절부절 못하는데 더 요란하게 번개가 번쩍하고 천둥이 치더니 잠겼던 광문이 덜컹 열리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탁발승의 말이 생각나 얼른 광속을 빠져나와 동북쪽 산골짜기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얼마쯤 달려가던 며느리는 집에 남아 있는 아이들이 생각이 나서 뒤돌아 보지 말라던 스님의 말을 잊고 집이 있는 쪽을 뒤돌아 보았다. 그순간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더니 며느리의 몸은 돌로 변해갔으며 집이 있던 자리는 땅속으로 꺼져내려 온통 물이 괴고 말았다. 물이 고인 집터가 의림지이며 며느리가 변해서 돌이 된 바위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제비바위(연자암)근처 어디엔가 서 있다는 것이었다

며느리소(沼)

제천시 봉양면 옥전리에 며느리 소가 있다. 옛날 옥전리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아주 나쁜 집이 있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하는 모든 것이 눈에 거슬렸다.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의 입에서는 잔소리가 자주 튀어 나왔다. 며느리는 세상에 자기보다 더 심한 시집살이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고부간의 사이가 안좋다는 소문이 동네에 좍 퍼졌다. 며느리는 이것이 고통스러워 늘 신세를 한탄하고 있던 중 하루는 집안식구들이 벗어 놓은 옷을 한보따리 안고 빨래를 하러 가까이에 있는 냇가의 늪으로 갔다. 물가에는 뽀죽하기가 마치 촛대석처럼 생긴 바위가 서 있었다. 며느리는 빨래감을 내려 놓고 하염없이 물 속을 들여다 보고 있다가 재미 없는 시집살이가 새삼 서러워졌다. 한참을 서서 눈물을 흘리던 며느리는 촛대처럼 생긴 바위로 빨랫감을 옮겨놓고 그 옆에 신고 있던 짚신을 벗어논 다음 슬피 세 번 곡을 하더니 몸을 물속으로 날렸다. 시어머니가 돌아오지 않는 며느리를 찾아 나섰다가 늪에서 시신을 건져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물을 며느리소라 부르게 됐고 촛대 바위에 올라가 곡을 세 번하고 물속에 몸을 던지면 비록 물이 깊지는 않지만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고 싶거든 며느리소에 가서 촛대 바위에 올라가 곡을 세 번 하라는 말이 생겼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