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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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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정보

부서
문화예술과
이름
김학선
전화번호
043-641-5522

이위

고려조의 문신이며 자는 직청, 본관은 수주.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때 호부 원외랑, 1100년(숙종 5) 급사중을 역임, 1104년 직문하로서 서북면 행영 병마사로 임관과 함께 여진 정벌에 종군했다.

김순명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거이(居易), 본관은 청풍, 호조 판서 김길통의 아들이다. 1453년 (단종 1) 생원이 되고,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급제, 교서관 정자.호조정랑을 역임, 1467년(세조13)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 성종때 좌리공신 4등이 청릉군에 봉해졌다.

형조.호조.병조.예조의 참판을 역임, 1483년(성종 14)에 황해도 관찰사로서 내수사의 노비를 장살한 죄로 파직 되었다가 1485년 다시 관찰사에 봉해 졌다. 글씨가 뛰어났으며, 시호는 공야이다.

조위

조선시대 문신이며 학자로 자는 태허. 1471년(성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491년(성종 22) 검상.장령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도승지를 역임.1493년(성종 24) 호조참판이 되고, 이어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사림간의 대학자로 추앙 되었고 김종직을 비롯한 신진사류의 지도자였다. 글씨를 잘 썼고, 황간의 송계서원, 금산의 경렴서원에 배향, 시호는 문장이다.

이지함

조선중기의 학자로 기인(奇人)이며, 자는 형중, 호는 토정. 제천 수산면 성리에 토실을 구축하고 학업을 성취하여 호를 토정이라 하였으며 토정구지가 남아 있다고 전한다. 물욕이 없어 평생토록 가난한 생활을 했고, 의약.복서.천문. 지리.음양.술서에 모두 능통했으며,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아산의 인산서원, 보령의 화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강이다.

임응용

조선중기에 무신으로 자는 희운이며 본관은 장흥으로 1522년(중종18)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에서 출생했다. 1556년(명종 11)에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때 공을 세워 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제주도에서 해송 8그루를 가져다가 주거지인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심었다. 이런 연고로 동리 이름을 팔송이라 하고 팔송정을 창건하였다 한다. 지금은 탁사정으로 개칭하여 현존한다.

박수검

조선 숙종때의 학자로서 그의 묘소는 제천시 천남동 남산사 동쪽 기슭에 있다. 어려서 조석윤에게 문장과 서예를 배우고 후에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서를 비롯하여 여러서적을 탐독하고 특히 역사에 조예가 깊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제천으로 돌아와 의림지 아래에서 은거하면서 자칭 임호처사라 하고 후학을 가르치는데 전념하였다. 1827년 (순조 27) 3월 이고장 사람들이 의림지 호반에 의호사를 창건하고 제향하였는데 1871년(고종 8)에 철폐되었다. 저서로는 임호집, 절위여편 등이 있다.

효의황후

조선 정조때의 비로서 본관은 청풍이며 좌참찬 김시묵의 딸이다. 1762년(영조 38) 10세로 세손빈에 책봉되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고 성품이 온후하고 공손하여 궁중에 칭송이 자자했다. 일생을 검소하게 지냈고, 여러차례 존호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했다. 휘호는 예경자수이고, 능은 수원에 있는 건릉이다.

유중교

조선 고종때의 학자로 자는 치정(致政, 穉程), 호는 성재(省齋)로 1821년 (순조21)에 태어나 이항로(李恒老)와 김평묵(金平默)에게 학문을 전수받았다. 1881년 (고종18년)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여론이 일어나자 김평묵과 함께 척양척왜(斥洋斥倭)와 구법보수(舊法保守)를 열렬히 주장했다. 1889년 춘천에서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로 이사하여 자양서사(자양영당의 전신)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의 묘소는 제천시 백운면 달성산에 있고 자양영당에 제향되었다.

유인석

한말의 유학자인 이항로(李恒老)의 학통을 이어 받은 명망 높은 유학자이자 전기 의병운동에 있어서 가장 기세를 떨친 제천의병진의 의병장으로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庵)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국모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그해 그를 대장으로 하는 제천 의병진이 편성되게 되었다.

그는 중군장에 이춘영, 전군장에 안승우 후군장에 신지수 등으로 의병진을 편성하고 충주성을 점령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그 후 계속되는 패배로 의병을 해체하고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0도의군 도총재에 추대되어 이상설, 이범윤 등과 두만강 연안으로 진공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일본의 농간으로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15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로는 소의신편, 화동속강목, 의암집이 있고 영정은 자양영당에 안치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강년

호는 운강(雲崗) 자는 낙인(樂仁)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1880년 3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나 개화정책에 불만을 느끼고 낙향하게 되었다. 1907년에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즈음하여 윤기영 등과 함께 의병을 크게 일으킨 이강년은 제천으로 몰려든 여러 의진과 함께 제천 천남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으며 이후 호좌의진을 재건하여 대장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후기의병전의 특징이기도한 유격전의 양상을 띠었으며 갈평,사리재,영월,죽령 등 소백산 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그의 활약은 험준한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이동하여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전투의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고 이강년의 의진이 약해짐에 따라 1908년 7월 2일 작성산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10월 13일에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국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홍사구

을미사변 이후 스승 안승우와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제천 남산 전투에서 격전끝에 전사한 애국소년으로 전사 당시 그의 나이 19세였다. 정부에서는 공을 기리기 위해 1963년에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천관우

제천시 청풍면 출신으로 동아, 조선, 한국 등 중요신문사에서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하였으며 사학자로서 한국사의 정립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8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제천시와 제원군이 분리될 당시「제천 시민헌장」을 지어 제천시민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해 주었다.

언론계와 사학계의 중진으로 생애를 일관해온 천관우는「생애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떳떳한 삶의 비결」이라고 1980년 외솔상 수상 당시 그의 사생관을 밝힌 바 있다. 이런 기개는 실생활에도 연결되어 1971년 민주수호협의 공동대표 등 반독재 투쟁에 발벗고 나서「서서 죽을지언정 무릎끓고 살지 않겠다」고 스스럼 없이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