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택소개
성재 유중교 선생 고택
성재 유중교 선생
자는 치정(致政), 호는 성재(省齎), 초명은 맹교(孟敎), 본관은 고흥이다. 조선 말기의 학자로 이항로의 문인이며, 이항로 사후에는 김평묵을 스승으로 했다. 위정척사론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학자이며, 장담마을에 자양서사를 세워 유인석과 이소응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21세 때 화서의 지도로 『송원화동사합편강목』을 편수 했다.1876년과 1882년에는 선공감역과 서혼부지평에 각각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1881년 척사위정의 소론이 일어나자 김평묵과 함께 구법보수와 척양척왜를 열렬히 주장했으며, 이러한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게도 이어져 격렬한 항일 의병운동으로 반전된 계기가 되었다. 1886년 이항로의 심설(心設)에 대해 김평묵과 충돌하면서 화서문인이 사실상 두 갈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1889년 춘천에서 제천 장담으로 이주하여 자양서사를 세우자 성재를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장담으로 모여 들었다. 1893년 서거하였으며, 자양영당에 배향되었다. 서거 후 제학에 추종되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저서로는『성재집』등이 있으며, 묘소는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에 있다.
의암 유인석 선생 고택
의암 유인석 선생
호는 의암(毅菴), 자는 여성(汝聖), 본관은 고홍이다. 14살 때 이항로에세 수학했으며, 그 뒤 김평묵, 유중교에게 수학했다. 1893년 성재가 장담에서 운명하자 자양서사에서 강학하던 유중교의 기반을 계승하기 위하여 1895년 6월 춘천 가정리를 떠나 장담으로 옮겨 후진을 양성했다. 1895년 국모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발표되자 의병을 일으키자는 의견이 급속리 확산되어 이해 12월 30일 제천의병진이 편성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896년 충주성을 점령하는 등 크게 기세를 떨쳤으나, 의병진이 각처에서 잇달아 패배하자, 재기항쟁을 도모하기 위하여 황해도, 평안도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재기항쟁도 어려워지자 압록강을 건너 만주 통화현 오도구에 정착했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을 피해 귀국한 뒤에는 서북지역에서 강학활동을 전념했다. 1908년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1910년 13도의군을 결성하고 도총재에 추대되었다. 일본은 러시아와 외교 교섭을 통해 이곳의 항일운동 세력에 일대 탄압을 가하여 13도의군이 와해되자 그는 모든 지사와 사우들은 국내에 머물지 말고 간도로 건너가 함께 수의하여야 한다며 수화종신(守華終身)할 것을 주장하고, 그 자신도 연해주를 떠나 1915년 망명지에서 74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자양영당에 배향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상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의암집(毅菴集)』등이 있다.
- 부서
- 문화예술과
- 전화번호
- 043-641-4811